1.먼저 본문26-29절의 말씀보시겠습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하나님의 성도 여러분! 지금의 시대상황이 하나님의 홍수심판과 불과 유황이 쏟아져 내리기 직전의 소돔과 고모라 같지 않습니까? 이 보다 더 타락하고 이 보다 더 음란하며 이 보다 더 잔인한 시대가 과연 언제였습니까?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음란하고 여자가 여자로 더불어 음란을 일삼는 시대! 몸에 무늬를 넣지 말라 했는데 온 몸에 문신을 하는 것이 유행인 시대!돈을 위해서라면 사람목숨을 조금도 아끼지 않는 시대! 그래서 불신자들조차 희망이 없다고 하는 시대!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께로 그 마음과 삶을 돌이키지 않습니다. 여전히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는 오직 육체의 나라를 위해서만 몰두하고 있으니 과연 어찌되겠습니까? 성직을 행한다는 목회자들조차 모이면 연봉액수와 성도 수를 논하며 도토리 키 재기를 하고 있으니 그 입에서 쏟아지는 말이 어찌 성도들에게 생명이 되겠습니까? 생명 없는 소리를 듣고 사니 생명 있는 소리 듣기를 싫어합니다.
2.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성도는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노아시대의 사람들은 홍수심판직전까지 세상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그 어느 누구도 그토록 애쓰고 탐내던 세상나라를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힘자랑하던 모든 사람들,온갖 힘을 들여쌓았던 모든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무시하고 비웃고 깔보던 노아와 그 가족이 그 온 땅을 차지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창9:1절)
또한 소돔과 고모라 땅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그들도 세상에서 한 평의 땅이라도 더 늘이고 남들보다 더 많은 재산을 불리며 그 누구보다 재미난 세상을 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그 누구도 자신들이 그토록 원하던 세상을 차지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던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만이 그들이 넘보지 못했던 땅을 차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자들에게 하늘과 땅과 원천의 복으로 기름 부으십니다. 참 복은 땅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부으십니다. 하늘을 열고 살 때 땅의 복은 은혜로 열매 맺는 것입니다.
신명기 8장1절에서 증언합니다.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신8:1절)
노아시대의 사람들은 홍수가 자신의 턱까지 차올랐을 때 무엇을 생각했을까? 또한 소돔과 고모라땅의 사람들은 불과 유황이 비같이 쏟아져 내릴 때 무어라 말했을까? ‘육체가 아니라 영이 답이었구나. 땅이 아니라 하늘이 먼저였구나’하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여기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오직 하나님을 섬김으로 하늘과 땅과 원천의 모든 복을 차지하는 은혜는 누리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이제 본문 31-33절의 말씀보시겠습니다.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그렇습니다. 세상나라에 살지만 결코 세상에 속할 수가 없음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나라의 삶을 이 세상에서 살아내야만 합니다. 주님의 날에 이 세상에서 모아놓은 세간살이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님의 날에 이태리 명품양복, 주님의 날에 페라리 자동차, 주님의 날에 금은보석, 주님의 날에 세상권력과 명예가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이보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심판의 날에도 모아놓은 재산을 움켜쥐려는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이라니 말입니다.
4.그런데 세상욕심에 빠지면 그렇게 어리석은 일을 행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실제로 폼페이의 화석에 보면 당시의 귀족들은 그 마지막순간에도 금화를 가득히 움켜쥔 채로 죽은 모습들이 많습니다.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
롯의 처는 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는 긴박한 순간에 소돔과 고모라 땅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까? 그 땅의 사람들이 불쌍해서였을까? 아니면 그 땅에 미련이 남아서였을까? 우상숭배인 탐욕에 통치 받았던 자의 결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체를 위해 사는 자는 죽음에 처하게 되고 영으로 사는 자는 영원히 살게 됩니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육체의 영광이 아니라 영혼의 영광입니다. 이 땅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육체는 무익하고 영은 살리는 생명입니다. 저는 여기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세상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고, 육체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혼의 영광을 위해 살다가 약속된 주님과 함께하는 영광의 나라를 차지하는 은혜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5.하나님의 성도 여러분!
이런 질문을 드려 볼까요?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옷을 입은 성도들을 왜 여전히 세상이라는 속세에서 살게 하실까요? 구원의 옷을 입히셨으면 곧장 영생의 나라로 올려가시지 왜 이 죄악 많은 세상에 그대로 살게 하시는가? 말입니다. 그것은 이 세속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거룩한 삶으로 초대받은 자들의 삶이 어떤지를 알려주라 하심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물든 사람들의 삶이 세속의 사람들과 어떤 인격과 성품의 차이가 있는지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냄으로 그들 또한 하나님의 자녀 되는 길로 인도하라 하심입니다. 그런데 만일 구원의 옷을 입은 우리가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지 못하고 세속의 사람들과 동일하다면?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이미 죽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고 여전히 육체로 살아간다면 어찌되겠습니까? (작금의 우리 한국교회현실이 말해주지 않습니까?
목사가 목사답지 않으니까 성도가 성도답지 않으니까 세상사람들이 나서서 교회를 정화하라고 난리아닙니까……..)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야 생명 되고 복이 되고 영광이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노아와 아브라함처럼 이 세상에서도 복이 되며 하나님의 나라도 차지하게 됩니다. 과연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직조된 구원의 옷을 입은 자로서의 마땅한 삶을 살아내고 있습니까?
세상과 차이 나는 거룩함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예수피로 물든 자의 선명한 인격과 성품의 차이가 나타나기를, 하늘을 입은 품격 있는 삶이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의 품격은 돈이 말해주지 않고 거룩한 성품으로 나타납니다.
6.이제 본문 34-35절의 말씀보시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세상에 이보다 극적인 일이, 세상에 이보다 더 참혹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두 사람이 동일한 공간에서 동일한 잠자리에 누워 자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한 사람은 버림을 당한다니 말입니다. 어쩌면 저녁식사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것을 먹었을 텐데 왜 그 밤에 누구는 구원받은 자의 처소 하늘나라로 들림 받고 왜 다른 한 사람은 버림받은 자리 가장 참혹한 형벌이 임하는 자리로 떨어진다는 말입니까?
또 두 여인이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맷돌을 가는 중에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였습니다.
과연 무슨 이유 때문에 동일한 자리에서 동일한 일을 하다가 하나는 영원한 영광의 세계로 들림 받고 왜 다른 하나는 지옥으로 버림을 받는 다는 말입니까? 세상이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하루 세끼 똑 같은 양의 식사를 하며 같은 잠을 자며 같은 일을 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도대체 왜 이런 극적인 일이 벌어진다는 말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강조하시는 것은 삶입니다. 삶다운 삶 즉 육체를 위한 죽음을 낳는 삶이 아니라 영에 의한 생명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우리 인간에게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는 것은 필연이지만 문제는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행위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절)
7.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면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신앙의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적당하게 타협하며 믿어라. 게을러도 좋다. 네 상황에 따라 믿어도 된다. 세상과 섞여도 좋다. 손에 가득 쥔 것이 너의 힘이다.’ 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열심을 내어라.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라. 오직 예수님의 말씀대로 신앙해야 한다. 하나님의 너의 힘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성도들의 믿음의 삶은 어떻습니까? 왜 하나님의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의 삶과 구별이 없는 것일까요? 과연 그렇게 살아도 주님의 재림의 날에 자신의 몸이 죽을 몸에서 죽지 않을 몸으로 변화될 거라 믿는다는 말입니까?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과연 우리는 홀연히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구름 타고 다시 오실 하나님의 나라이신 예수님의 재림의 시간에 준비된 삶입니까? 구별! 구별! 구별!!!
오늘 저와 여러분은 데려감과 버려둠의 사이에서 어디에 속해있습니까? 결코 영원할 수 없는 잠깐의 시간입니다.
고전 15:50-51절에서 증언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저는 여기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데려감의 은혜를 입을 삶으로 각자의 시간을 살아 예비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