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은 먼저 본문과는 맞지 않는 주제이지만 지난 수요일 (2015년 1월 21일)에 있었던 일을 간증하고자 합니다. 매주 화요일 거리전도 찬양집회, 그리고 금요일 거리의 교회 예배 를 마치고 양식 나눔 사역을 해 오고 있습니다. 오늘까지 15년 이 사역을 하면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작은 것 하나라도 나눌 수 있는 것처럼 하늘의 기쁨을 누리는 일도 드물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광장에서, 거리에서 양식 나눔 사역을 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금요 거리의 교회 예배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에게 더 깊은 신앙적 훈련과 돌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까지 이곳 부다페스트에도 우리 자체 건물이 있기를 소원했습니다. 언제가 될 런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면 아주 귀한 공간이 마련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에 앞서서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아니 우리 은혜교회위에 86평방미터의 작지 않은 공간을 거저 주셨습니다. 물론 지하이기는 하지만 잘 수리하면 아주 놀랍게 사용될 할 하나님의 거룩한 장소가 될 것입니다.
2. 지난 해 가을, 저는 현지인 교회 클라라 목사님을 통하여 시청에 문의를 하였습니다. “시청 소유의 건물을 무상으로 임대하여 달라” 그러나 시청에서는 “약 오십 만원의 임대료를 내거나 혹은 아주 형편이 안 좋은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사용하되 그것도 약간의 임대료를 내야 한다.”는 회신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3주 전 부다페스트의 교회 연합모임 중에 우연찮게 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제게 지금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클라라 목사님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그곳에는 오순절 계통의 “마하나임 교회”의 담임목사님도 있었는데 그가 이렇게 제안을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에 사용하지 않는 건물이 있는데 그럼 우리가 빌려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수요일, 그곳 마하나임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이런 감동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사용하지 않는 건물이 있다? 그런데 그곳을 빌려준다? 아니야 빌려 줄 것이 아니라 그냥 주어야 마땅하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는데 사용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쓰겠다고 하면 그냥 주어야지? 일단 가서 보고 합당하면 그냥 달라고 하던지 십 포린트에 팔라고 해야겠다.”
3. 저는 감동주시는 마음을 현지인 교회 클라라 목사님에게 말하였더니 어이가 없어도 한참 없다는 듯이 웃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확신에 가득차서 이야기 했는데 그는 웃더라 그 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가 말한 것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도무지 상상도 못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하나임 교회에서 코바츠 죄르지 목사님과 기도를 하고 마주 대하고 앉았습니다. 눈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저는 이미 눈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의 눈도 이미 말하는 듯 했습니다.(중략) 저는 그 목사님의 안내로 빌려주기로 한 지하 건물로 갔습니다. 수개월 전까지 매일 사용하던 곳이라고 했습니다. 아주 괜찮았습니다.
4. 다 돌아본 후 저는 물었습니다. “이 건물을 팔려면 얼마에 파실 겁니까?”......... “아! 저희가 이 건물을 5밀리오(이천팔백만원)에 팔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신목사님이 사시겠다면 원하는 만큼 내고 사십시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저에게 10포린트(50원)에 파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화였습니다. 아주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죄르지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목사님! 사실 저희는 내부적으로 목사님께서 사용하시겠다면 기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사시든지 기증을 받으시든지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아! 하나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목사님! 그럼 기증 받기로 하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선택하신 우리 성도들 가운데서 일하십니다. 바로 여러분들의 삶에서 때로는 놀랍게, 때로는 은혜롭게, 때로는 신비하게 일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기대하며 신뢰하심으로 예비 된 복을 누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66편 5절에서 증언합니다. “와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 하신 놀라운 일들을 보십시오.”
5. 이제 오늘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스스로 존재하시는 영원한 영적 존재이신 영광의 하나님의 오른손에 헬라어로 “비블리온” 이라는 두루마리가 들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일곱인으로 봉해져 있었습니다.(sealed with seven seals) 일곱은 하나님의 완전수이니까 일곱인으로 봉하여진 그 책은 ‘완전하게 닫혀 있었다. 열수 없도록 막혀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도대체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려진 그 두루마리 안에는 무엇이 그리고 어떤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일곱 인으로 봉하여진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려진 책! 과연 그 안에는 무엇이 기록되어 있을까요?
6.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 세 가지만 알아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에스겔서 2장 8-10절의 말씀입니다.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내가 보니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그렇습니다. 곧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 기록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심판과 보상 그리고 징벌에 관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인생의 길은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이 놓인 질서의 길입니다. 그러기에 선한 일을 행한 사람은 그에 합당한 상급과 보응을 받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생명의 부활로 나아갑니다. 또한 악한 일을 행한 사람 역시도 그에 합당한 심판과 징벌을 받습니다. 악한 일을 행하고서도 그에 합당한 징벌을 받지 않는다면 인생은 불공평합니다. 악한자의 결국은 심판의 부활입니다. (요5:29) 그래서 삶이 불공평한 것 같아도 가장 공평합니다. 정의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것을 추수하기 위해 지금의 삶을 심어가고 있습니까?
7. 둘째로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두루마리 책에는 어떤 비밀이 담겨 있을까요?
이사야서 29장 11-12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또 무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곧 사람들이 읽기 싫어하는 책, 영적으로 소경이 되었기에 읽고 싶어도 읽을 수가 없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은 눈 뜬 소경들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그리고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 같은 세상 아닙니까? ‘밝히 본다.’ 하는 세상 사람들이 행하는 일들은 과연 어떤 것들입니까? 또한 ‘두 눈 다 가졌다.’ 하는 사람들이 열심 내어 나아가는 곳, 그 최종의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밝히 본다 하면서도, 두 눈 시퍼렇게 떴다하면서도 왜 사람들은 죽음의 일들을 행하며 영원한 형벌과 죽음을 향하여 치닫고 있는 것입니까? 밝히 본다면 생명으로 나아가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소경되었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9:41) 오늘 우리는 보아야 할 것을 보고 있습니까?
8. 셋째로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려진 일곱인으로 봉함된 책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을까요? 다니엘서 8장 26절입니다. “이미 말한바 주야에 대한 이상이 확실하니 너는 그 이상을 간수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니라.” 무슨 의미입니까? ‘마지막 때의 일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었다.’ 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영원히 계속될 무한한 세상이 아닙니다. 그날과 그 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있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코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는 유한한 세상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마지막 때의 일에 관하여 아주 단호하고 분명하게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알려 주셨습니다.
과연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들은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과연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세상 속에는 마지막 때가 가까 왔다는 현상을 발견 할 수 없을까요? ‘오늘의 현 주소인 타락의 극치, 짐승적인 잔악함, 냉담하게 식은 마음, 오직 눈에 보이는 물질 세상에 대한 탐욕의 추구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마지막 때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영벌과 영생의 길이 갈리는(마25:46) 그날과 그 시에 대하여 과연 우리는 어떻게 준비되어가고 있습니까?
9. 그렇습니다. 위의 세 가지 견해를 종합해 보면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려져있는 두루마리는 한 개인의 삶의 역사와 계획과 섭리, 그리고 인류 역사와 우주에 관련된 하나님의 신비한 모든 계획들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이 말씀을 대하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려진 저와 여러분을 향한 계획하심과 뜻하심은 과연 어떨까요? 또한 오늘날까지 걸음걸음 살아오면서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을 수도 없이 겪었고 지금도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시간 속을 걸어가고 있으실 텐데....... 오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비밀스런 섭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리고 온 우주까지 미치게 될 마지막 날에 저와 여러분의 운명은 어떻게 전개 될까요? ........그리고 그 다음은요?
10. ‘어제의 그 고난을 무슨 의미였지? 그때 왜 나는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을까? 오늘 나는 어쩌다가 이 자리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오늘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나는 왜 그날 넘어지지 않아야 할 자리에서 넘어진 걸까? 나는 오늘 왜 원치도 않았고 예상하지도 못했던 이 고난과 아픔과 눈물의 골짜기를 걸어가야만 할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지혜와 지식과 경험으로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하나님의 나 자신을 향한........, 가족을 향한 그리고 나라와 인류와 전 우주를 향한 계획과 섭리를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증언합니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전1:21) 왜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어찌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섭리는 언제나 옳고, 언제나 최고이고, 언제나 선하고 복되고 보배롭게 완성된다는 사실입니다.
11. 우리가 잘 아는 사람, 꿈꾸는 자로 불리던 요셉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형들에 의해 애굽의 노예상에 팔려가는 그 상황의 비밀을 과연 누가 알겠습니까? 보디발의 종으로 팔려 가서 온갖 험난한 세월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던 요셉의 삶에 대한 비밀을 과연 누가 알아내겠습니까? 또한 오르는가 싶더니 더 깊은 나락으로 꼬꾸라져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감옥살이에 빠져든 그 고난의 비밀은 누가 알겠습니까? .........오랜 세월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되고 극적으로 형제들을 만나 요셉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 하나님께서 하셨다!!! 그렇습니다. 헤아릴 수 없고, 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인생길의 완성자는 오직 하나님 이십니다. 그 지존하신 분께서 내 길을 정하셨고 그 길을 따라 오늘도 내일도 선한 목자가 되셔서 인도해 가십니다. 때로는 돌부리가 가득한 산언덕으로, 때로는 차가운 강물 속으로 끌고 가십니다. 때로는 모래밭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은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선한 목자이시며 하늘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욥기 23장 10절에서 증언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