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먼저 오늘의 주제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로 증언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지난 주 목요일, 떠떠반여 집시마을 사역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평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마음에 듣고자 함이었습니다. 그곳은 일반 평원이 아니고 자연림이 가득한 곳입니다. 조금 걸으며 하나님께 마음을 하소연 하노라니 웬 들짐승이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저 녀석은 어떤 녀석일까?” 저는 그 자리에 멈춰서 그 녀석을 가만히 보았습니다. 제가 가고자 하는 길로 점점 걸어오는데 꼬리가 긴 것이 영락없는 여우였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오는가 싶더니 저를 발견하고는 옥수수 밭으로 냅다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저 놈은 왜 날 보고 저리도 급히 도망치는 거야? 내가 제 깐 놈 잡아서 목도리라도 만들까봐 그러나?”
* 또 한 참을 걸으며 전능자의 성호를 불렀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저 앞에 귀가 커다란 것이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는 들 토끼가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다시 조심스레 발걸음을 멈추고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그녀석도 저를 알아챘는지 자연림으로 쏜살같이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또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이 녀석은 왜 그리 급히 도망치는 거야? 내가 제 녀석에게 총이라도 겨누었나?” 그렇게 그곳에서 한참을 서서 들녘을 보며........ 하늘을 보며........ 하나님 아버지를 응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길, 저 만치에서 제법 큰 고라니가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녀석 역시도 저를 발견하더니 들녘으로 껑충껑충 달아나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또 생각했습니다. “아니 저 녀석은 이렇게나 거리가 먼데 왜 달아날까? 내가 뭘 어찌했다고 달아나는 거야?”
* 저는 천천히 걸으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여우도 토끼도 고라니도 내게 가까이 오지 않고 달아나 버렸을까? 아담이 범죄 하기 전에는 모든 생물들의 이름을 지어줄 만큼 그들과 함께 하였는데(창2:19)........ 아! 그러고 보니 내안에 죄악이 가득해서 그렇구나. 내 안에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다툼이 많아서............ 내 안에 욕심과 분노, 교만과 정욕과 살기가 가득해서 그렇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만일 풀이었다면, 제가 만일 나무였다면, 제가 만일 꽃이었다면, 그 들짐승들이 도망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만일 저의 심령이 사랑으로 충만하였다면 동물들이 나를 피하지 않고 사랑받기위해서 오히려 가까이 했을 텐데 말입니다.
* 아시시의 성자로 불리던 성 프랜시스는 모든 피조물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동물들과도 대화하였다고도 전해지지 않습니까? 그의 마음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가득해서 동물들을 부를 때도 “참새 자매여! 비둘기 자매여!” 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언제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가득하여 이웃과 자연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언제쯤 하나님의 성품으로 충만하여 동물들이 도망치지 않고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하나님의 피조물이 될 수 있을까요?
* 여러분도 이미 느끼고 계시듯이 근자에 들어 온 세상이 참으로 극심한 참사들로 가득합니다. 우리나라 세월호 참사를 비롯하여 푸틴과 러시아의 영토 확장에 대한 야욕으로 빚어진 우크라이나의 전쟁, 그에 따른 말레시아 항공기 피격,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의 전쟁, 땅에서 하늘에서 바다에서 얼마나 많은 사고들이 끊이지 않습니까? 최근 들어 아프리카에는 '에볼라' 라 이름 하는 바이러스가 다시 창궐하면서 이미 사망자가 칠백 명을 넘어섰다는 소식도 듣습니다. 치사율이 무려 90%가 넘는 바이러스입니다. 온 세상이 어찌 보면 더 이상 앞으로도 갈 수 없고 뒤로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에 놓인 형극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어찌해야 온 세상이 서로 사랑하며 강건하며 평화할 수 있을까요? 문제 해결의 길이 어디에 있을까요?
*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이래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어디에도 완전하거나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제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 하여도, 제 아무리 능력 있다 하는 사람도 하늘 아래서 살아가기에 시시때때로 능력의 한계, 흙으로 빚어진 인간의 한계를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내가 이 정도밖에는 안되나? 내가 겨우 이런 사람이었나?” 깨닫게 되지요. 그러나 지극히 교만하고 어리석은 사람들 중에는 제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까불기도 합니다만 그 결과는 참혹하기 그지없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하신 말씀처럼 하늘아래서 까불다가는 철저히 무너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완전한 나를 완전케 하는 힘! 부족한 나를 부요케 하는 능력은 어디로부터 얻을 수 있겠습니까?
*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진리의 말씀을 듣기 위해 빈들에 모여든 오천 명이 넘는 허기진 사람들!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면 최소한 칠팔천 명쯤은 될 것입니다. 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배부르게는 아닐지라도 적당한 음식을 나누려면 얼마의 돈이 필요하겠습니까? 제가 한명 당 최소 삼천 원씩 만 계산하여보니까 무려 이천 사백만원이나 되더군요. 머리 둘 곳도 없으셨던 예수님의 삶! 두벌 옷도 아니고 두 개의 신발도 아니고 넉넉한 돈주머니를 차고 살아가는 것도 아닌 방랑하는 복음 전도자들! 그들에게 이천사백만원의 돈은 한마디로 어마어마한 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거뜬히 해결할 수 있는 돈이 될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게는 결코 그럴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 게다가 설령 그만한 돈이 수중에 있다고 하여도 문제는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어디서 구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들녘에 음식 백화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요. 또한 그 많은 사람을 먹이려면 얼마나 큰 음식백화점.......얼마나 많은 버거킹, 맥도날드 햄버거 가게가 있어야겠습니까? 참으로 큰 문제 아닐까요? 앞으로도 막히고 뒤로도 막혀있는 진퇴양난의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돈도 없고 음식점도 없는 빈들 한 가운데서 칠팔천 명의 허기를 달래주어야 하는 일이 주어졌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해결의 방도, 문제해결의 열쇠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 하나님의 약속하신 복을 얻고야 말겠다는 당돌한 믿음으로 에서에게서 팥죽 한 그릇과 떡 몇 조각으로 장자의 명분을 갈취한 야곱! 그것도 모자라 교묘한 속임수로 아버지 이삭의 임종 직전, 맏아들에게 주려던 복까지 가로챈 야곱! 순리를 거스르고, 하나님의 질서, 가족의 질서까지 무너뜨리는 그의 삶과 투쟁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믿음의 세계 안에서만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만일 세상의 눈으로 본다면 야곱의 행동은 못된 놈 중에서도 아주 못된, 상종 못할 종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 그의 침노하는 것 같은 복을 얻어내기 위한 삶의 일단의 결말은 에서의 살기 가득한 분노를 피하여 밧단아람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밤과 낮을 가리지 않는 수고와 헌신의 시간, 인내와 고난의 시간을 지내어야 했습니다. 그 세월이 무려 20년이나 되었습니다. 창세기 31장 40절에서 우리는 그의 나그네살이 20년의 일면을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여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
여러분! 이러한 고단한 삶으로 20년의 세월을 살아온 야곱의 영성은 어떠했을까요? 또한 오늘 이 세상 나그네 길에서 20년 30년 40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영성은 어떻습니까?
* 사랑하는 여자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한 14년의 시간! 아니 아브라함과 이삭의 뒤를 잇는 하나님의 상속자로서의 사명의 시간 20년의 세월을 지낸 야곱! 그에게 하나님의 때가 찼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돌아가게 하시는 곳, 고향땅 가나안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말입니다. 빈손으로 밧단아람으로 왔었는데 2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은 그때와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 물론 제일 크고 존귀한 재산은 두 명의 아내와 두 명의 첩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난 열 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수백 수천마리의 암염소와 수 염소, 암양 수양, 낙타, 암소, 황소, 나귀등 수많은 가축이 그의 재산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수십 채의 고급 아파트를 비롯하여 여러 개의 골프회원권, 리조트회원권 그리고 세계유수의 자동차가 수십 대, 금과 은을 비롯한 수많은 다이아몬드가 그의 재산이었던 것입니다.
창세기32장 10절에서 야곱이 고백합니다.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정처 없는 나그네 길에서 누가 이토록 큰 은혜와 은총으로 부요하게 하셨을까요? 그리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에 부어지는 은혜와 은총은 어디로부터 임하고 있습니까?
* 야곱은 하나님께 받은 모든 재산을 챙겨서 이제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20년의 타향살이 속에서도 계속되었던 근심과 걱정은 형 '에서' 였습니다. “형이 나를 원수로 생각하고 있을 텐데........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텐데.......... 형과는 어찌해야 하는가? 그가 여전히 나를 죽이려 들면 어찌해야 하지?” 평소의 생각했던 걱정이 가나안으로 나아가는 그의 마음을 심히 괴롭혔습니다. 야곱과 그의 모든 식구들의 걸음은 이제 Jabbok 강 가까이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가 걱정했던 것처럼 에서가 사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창32:6) “그렇구나! 형이 드디어 나를 제거하려고 군사들을 거느리고 오는구나.” 야곱은 두렵고 답답하여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을 위기 앞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어찌해야하지?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도대체 뭘까?”
* 극한 위기 앞에 놓인 야곱은 나름 지혜를 모아서 에서가 자신을 공격할 것을 대비하여 재산을 두 떼로 나누었습니다.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겠다는 계산이었습니다. 그리고 형의 그간의 감정, 노여움을 풀기 위한 예물을 준비하여 보냈습니다. 오늘 날로 말하면 Audi 스포츠카 10대, Volvo 세단 10대, 삼성 핸드폰, 애플 핸드폰 등 셀 수 없는 예물을 준비해서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두 아내도 두 여종도 그리고 열한 아들도 먼저 강을 건너도록 했습니다. 20년간 피눈물 나게 수고했던 자신의 모든 삶과 인생, 자신의 재산을 얍복강 건너편 가나안 땅으로 먼저 보낸 것입니다. 이제 여차 하면 그 모든 것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 이 문제를....... 이 위기를 어찌해야할지........절박함 그 자체였습니다. 이 크고 넘어설 수 없는 장벽 앞에 서 있는 야곱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Jabbok 강가에 홀로 남은 그는 하나님과 씨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유일의 길은 오직 야훼 하나님인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게 축복을 약속하신 여호와여! 내게 복을 주십시오. 이 장벽을 넘어서게 하소서.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시면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을 놓을 수 없습니다. 나를 해결하여 주십시오.” 매달리고 또 매달린 것입니다. 야곱은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져도 그가 붙든 하나님을 놓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는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한번 붙든 그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동이 틀 무렵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아! 야곱의 믿음이여! 야곱의 끈질긴 기도여! 아! 전능자의 구원하심이여!!!”
* 이제 우리는 이쯤에서 대적들의 손에 의하여 목숨이 경각에 이르렀던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을 향해 구원을 호소했던 다윗의 기도를 다시 한 번 읽으며 묵상해 보아야겠습니다.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1,6-9)
* 결국 야곱의 이름은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속임수로, 교묘함으로 대변되는 이름, 야곱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새 이름! 하나님의 상속자! 영원토록 계속되어질 언약의 축복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고독과 눈물의 얍복강은 구원과 축복의 브니엘로 바뀌었습니다. 할렐루야!!!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온 세계에는 그리고 우리의 삶에는 어떤 문제들이 있습니까? 내 자신의 문제, 미래의 문제, 건강의 문제, 자녀들의 문제, 물질의 문제, 직장의 문제, 사람들과의 문제,........ 무엇이 나로 한숨짓게 하며, 무엇이 나로 진퇴양난에 빠지게 하였습니까? 그리고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 하나님과 씨름하는 야곱!!! 허벅지의 뼈가 위골되는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한 번 붙든 하나님을 절대 놓지 않는 야곱!!! 그것은 야곱 자신만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뒤를 이어 영적인 이스라엘이 된 우리 성도들! 하나님의 상속자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지녀야할 영성입니다. 하나님과 동이 트도록 씨름하는 영성!!!
* 오늘 본문 28절에서 다시 증언합니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