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흙덩어리 인간은 늘 위태위태합니다. 견고히 선 것 같다가도 힘없이 넘어집니다. 맑은 것 같다가도 이내 흑암이 됩니다. 그리고 잘 되는 것 같다가도 금세 막혀 버리는 것이 흙으로 사는 우리인간의 삶의 실상입니다. 쭉 잘 되었으면 좋겠는데....... 끝까지 맑았으면 좋겠는데.......그리고 죽을 때 까지 형통하였으면 좋겠는데 그 바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현장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무엇이 그 고비 때마다 견고케 하며, 그 고난의 때마다 힘 있게 하겠습니까? 과연 누가 우리를 절망의 자리에서 소망으로 나아가게 하며, 죽음에서 구원으로 인도하겠습니까? 누구일까요?
* 지난 화요일 서부역에서 (2014년 8월 5일) 맘 다해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노라니 한 할머니가 다가왔습니다. 83세 된 할머니였는데 외모로는 그렇게 험난한 삶을 산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게 다가오더니 겸손을 여미고 이렇게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게 안수해주세요. 내게 축복해주세요” 무슨 사연이 있겠다 싶어서 물었습니다. “무슨 일로 안수를 받고 싶어 하시나요? 왜 축복기도를 원하시는 건가요?” 그러자 할머니는 “예, 건강 때문입니다. 제 아들의 건강 때문입니다. 그 아들 대신 제가 안수기도를 받고 싶습니다.” “왜요? 아들이 어디가 아픈가요?” “예, 당뇨병입니다. 56살인데 당뇨 때문에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 할머니의 눈가는 촉촉한 이슬이 맺혀졌습니다. 저는 83세 된 어머니가 56세 된 아들을 위해 간곡하게 안수기도를 소원하는 그분의 흰머리에 손을 얹었습니다. 그리고 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올렸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여! 은혜를 주십시오. 구원하여 주십시오.” 그런 기도였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니 그 노모의 눈에서는 깊은 눈물이 넘쳐났습니다. 저는 생각해보았습니다. 과연 누가 그 노모의 소원에 은혜를 베풀어 줄 수 있을까? 과연 누가 걱정과 근심, 한숨과 눈물에 잠겨있는 그 노모를 기쁨과 감사의 자리로 옮겨줄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누가 머지않아 삶을 마감하게 될 그 노모의 영혼에 구원을 베풀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아! 구원의 하나님! 불타는 긍휼을 품으신 아버지 하나님!!!!!”.........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11:8)
* 몇 칠 후 8월 15일이면 우리는 광복 69 주년을 맞이합니다. “나라가 합쳐졌다.”라는 일본어에 의해서 붙여진 ‘한일합방’은 1910년 경술년에 나라가 치욕을 당했다 하여 ‘경술국치’로 바꾸어 불려야 합니다. 1910년 8월 29일, 그 날 이후로 오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는 많은 부분에서 굴절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굴절된 역사, 일본에 의해서 자행된 그릇된 사고와 사상들은 21세기를 사는 오늘날까지도 우리 사회 안에서, 정치에서 그리고 문화 속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일제잔재청산’을 끊임없이 제기 하고 있습니다. 한민족 고유의 정신과 전통을 복원, 계승, 발전시켜나가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과거에 묶여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옛사람을 벗어야만 새 사람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34년 11개월 14일 동안 일본은 우리 대한 조선을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한글말살정책, 이름마저 일본식으로 고치라는 창씨개명, 일본왕실의 조상신이나 국가 공로자의 위폐를 모아 놓은 사당에 절을 하는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굴복하지 않으면 가차 없이 죽였습니다. 또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앞세워 우리나라의 토지와 농산물을 모조리 수탈해 감으로 백성의 삶을 극도로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풍수사상에 입각하여 우리국토의 흐름을 끊고 영웅적 인물의 출생을 막으려고 전국 각처 명산 명소에 쇠말뚝을 박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절과 정조를 생명보다 중시했던 이십여 만 명의 대한의 아름다운 소녀들을 강제로 끌어다가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그 삶을 송두리째 강탈하였습니다. 또한 남자는 강제 징병과 징용으로 전장의 최전방에 세워 총알받이가 되게 하거나 중한 막노동에 투입시켰습니다.
* 이 외에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잔인하고 참혹한 일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우리 대한 조선은 끝 모르는 고난에 빠졌습니다. 대한의 백성들은 내일을 알 수 없는 참담한 환란에 침몰되어 허우적거렸습니다. 십년의 억압이 지나고, 이십년의 환란을 당하며, 삼십년의 암흑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대한 조선은 출산율이 급격하게 떨어져서 민족이 단절될 최대의 위기 앞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과연 누가 이 억압에서 자유를........ 과연 누가 이 환란에서 기쁨을.......과연 누가 이 암흑에서 광명을 가져다 줄 것입니까?
*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길, 생명의 손길, 은혜의 팔로 당시 열강들의 역사를 주관하셔서 우리 대한민국을 극적으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날의 대한민국으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밝히 알아야 합니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나라든 민족이든 모든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나서 2장 5-6절에서 절대죽음에 던져졌던 요나가 증언합니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죽음의 물이 둘러싸고, 바다풀에 머리가 휘감기며,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던 그 생명, 땅이 거부하던 그 생명을 하나님께서 건져 올리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구원은 누구입니까? 그 분을 진정 신뢰합니까? 혹시 자신과 자신의 소유물을 신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 이제 우리는 다니엘서에서 우리의 심장에 불을 놓는 위대하고 놀라운 신앙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의 이름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입니다. 그들은 흠도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에 통달해 있던 유대의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벨론 왕국을 위하여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방언을 배우고 있는 포로였습니다. 포로로 잡혀 왔다는 것의 의미처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바벨론 왕과 그 국가에 대하여 철저하게 순종하고 복종하며 충성해야 했습니다.
* 그러던 어느 날, 느브갓네살 왕이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금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그가 만든 금신상은 높이가 육십 규빗, 넓이가 여섯 규빗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규빗을 대략 45cm로 계산 하면 높이가 27m 이고, 넓이가 2.7m인 거대한 우상이었던 것입니다. 그 높이만큼, 그 넓이만큼 느브갓네살은 교만했던 것입니다. 교만하면 망하는데 말입니다. 어쨌든 느브갓네살은 온 나라에 공포하여 모든 악기 소리가 들릴 때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백성은 엎드려서 그 금 신상 앞에 절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않으면 즉시로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져 넣겠다고 하였습니다.
* 결국 바벨론의 모든 백성들은 악기소리가 울려나면 금 신상 앞에 나아와서 엎드려 절을 하였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당연히 그래야 했습니다. 그런데 더 깊이 절을 해야 하고, 더 충성을 드러냈어야 할 포로 된 청년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오히려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꺾으면 꺾이지, 죽이면 죽지” 그 신앙이었습니다. 결과는 당연히 풀무 불에 던져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풀무의 온도는 평소의 칠 배를 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불의 뜨겁기가 얼마나 강렬했는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들고 풀무에 던져 넣으려는 사람이 먼저 불에 타서 순식간에 죽는 지경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그 믿음 충만하였던 청년들은 결박 된 채로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져졌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번만 엎드려서 금 신상에 절하였더라면 살게 될 텐데.............금 신상에 엎드리는 것이 뭐가 어렵다고........” 모든 사람들이 그 능력 있는 청년들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 이제 과연 누가 이 청년들을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거운 극렬한 풀무가운데서 건져 낼 수 있겠습니까? 과연 누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코 살아 올수 없는 죽음가운데서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재라도 건질 수 있으면 다행일 텐데요. 이제 우리는 금신상의 주인공, 자신의 금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결단코 죽음이 될 것이라고 했던 느부갓네살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증언을 들어보겠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다니엘 3:28) “아!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끄시는 생명의 하나님의 손이여! 절대죽음을 절대생명으로 건져내시는 구원의 팔이여! 오늘 저희도 이 암흑의 시대에서 구원하여 주소서!!!”
* 우리사람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사는 맹인입니다. 내일 일을 알 수 있다면 아니 한 시 간 뒤 혹은 삼십분 뒤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볼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위기와 고난으로부터 피할 길을 얻고 생명을 보존하겠습니까?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 인간에게는 그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크나큰 손해에 빠집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실패에 던져집니다. 사고를 당하여 극한 고난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죽음에 넘어집니다. 과연 이러한 우리의 삶을 위기에서 건져낼 힘은 무엇일까요? 과연 우리의 인생을 고난과 실패의 폭풍우 속에서 소생시켜줄 능력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과연 우리의 영혼을 영원한 저주와 죽음에서 건져줄 구원의 존재는 누구일까요?
*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 그 영광스러운 상속자가 된 야곱이 이십년의 고단한 나그네의 삶을 뒤로하고 고향땅에 정착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언제 자신이 이십년의 고난의 세월을 지냈는가 싶었을 만큼 야곱의 삶은 평온하고 형통하였습니다. 에서와도 기쁨으로 화해하였고, 자녀들은 보배롭고 아름답고 존귀하게 장성하여 충성스런 일꾼이 되었습니다. 가산은 풍성해질 대로 풍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늘 기쁘고 감사한 삶을 살았습니다. 특별히 밧단아람에서의 십사 년의 수고와 땀을 통해 얻은 사랑하는 여자 라헬 사이에서 태어난 장성한 요셉을 바라보는 것은 더 할 수 없는 기쁨 중에 기쁨이었습니다.
* 야곱은 요셉의 얼굴 속에서 죽음으로 자신의 곁을 먼저 떠나간 라헬을 보았습니다. 요셉의 웃음 속에서 라헬의 웃음을 들었고, 요셉의 행동 속에서 라헬을 발견하며 행복해하였습니다. 그래서 가장 값비싼 채색 옷을 지어 입힐 만큼 요셉을 그 어느 아들보다 더욱 사랑하였습니다. “이젠 아픔이 없겠지. 이젠 고난이 없을 거야. 이젠 눈물이 없을 거야!!! 이렇게 쭉 살면 되는 거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자로 그 이름까지 이스라엘로 바뀐 야곱에게 극한 슬픔과 애통한 일이 닥쳐왔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아들 요셉이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요셉의 형들의 손에 들려진 찢기고 피 묻은 채색 옷을 보고는 “이것은 내 아들! 요셉의 옷이로구나! 악한 짐승이 내 아들을 먹었구나. 내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정녕 찢겼구나.”(창 37:33) 하며 기절 할 듯이 애통해 하였습니다. 아무도 그 슬픔을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그 어떤 것도 그에게 위안이 되질 못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34-35절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자임에도 처하게 된 야곱의 슬픔과 애통을 보겠습니다.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과연 누가 야곱이 당한 이 극한 슬픔과 애통을 더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다시 바꾸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과연 누가 전혀 앞을 볼 수없는 야곱이 당한 암흑의 상황을 완전한 하나님의 상속자로써 약속이 성취되어가는 소망의 언덕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까? 또한 과연 누가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는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그 죽음에서 건져 부활의 아침과 같은 영광으로 인도해 줄 것입니까? 흙덩어리인 우리 인생을 향한 구원의 힘은 누구이며 구원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상속자로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에게 최후의 승리를 가져다 줄 영광은 누구입니까?
* 이제 우리는 창세기 45장 7-8절의 말씀에서 우리의 앞선 신앙인 들이 만났고 우리 또한 우리 모두가 만나야할 그 생명과 영광의 주인을 만나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시라! 흙덩어리인 우리들의 모든 구원은 오직 하나님이시라
* 오늘 로마서의 본문 12-13절에서 증언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