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오늘 본문과는 거리가 있으나 다 함께 깊이 생각해 볼 말씀을 증언의 서두에 놓고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한국의 조계종 승려이자 베스트셀러작가로 이름난 혜민 승려라는 분이 현재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장으로 있는 프랜시스 교종의 어록을 자신의 트위터에 옮기며 한국 방문을 환영한 것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저는 신문에 난 그 기사의 내용을 읽고서 한참 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을 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흙덩어리인 우리 인간, 그리고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가지의 크고 작은 죄를 짓고 사는 우리 인생들이 구원 얻을 수 있는 유일의 길과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 혜민승려가 자신의 트위터에 실었다는 프랜시스 교종의 어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선을 행한다면 우리가 저곳(천국)에서 함께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동의하십니까? 혜민 승려가 옮겨온 프랜시스 교종의 이글은 2013년 5월 자신이 즉위하던 해에 바티칸에서 행한 설교문이었습니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하셨습니다. 여기서 모두란 카톨릭 신자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모두를 의미합니다.......맞습니다. 무신론자를 포함한 모든 이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선행을 통해 만나야 합니다.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선을 행한다면 우리가 저곳(천국)에서 함께 만나게 될 것입니다.”
* 여러분도 이미 아시듯이 이것은 결코 진리가 아닙니다. 만일 무신론자라할지라도 선을 행하여서 천국을 갈 수 있게 된다면........ 그런 일이 열려있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친히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사람이 되셨을까요? 왜! 전능하신 분이 가장 보잘 것 없는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나시고 누우셨을까요? 그리고 왜? 예수그리스도는 그 엄청난 고통과 고난의 십자가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을까요? 그리고 왜? 주님은 죽음으로부터 부활의 영광을 세상만민에게 나타내셨을까요? “무신론자라할지라도 선을 행한다면 천국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유일의 구원임을 믿고 그 길을 걷고 있는 우리는 이 말을 과연 어떻게 이해하여야겠습니까? ‘그냥 단순히 선행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라고 이해할 수 있을까요?
* 무신론자와 선행과 천국은 도무지 성립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진리, 성경의 진리를 완전히 뒤집는 말도 아닌 말입니다. 만일 무신론자임에도 선을 행하여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인간의 선행이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죽음보다 앞서거나 동일한 것이 된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인간의 선행의 가치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대신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는 이 말에 대하여 과연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겠습니까? 만일 인간의 선행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천국에 갈 수 있다면...... 진정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람이 되실 필요도 없으셨고 당연히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도 없으셨습니다. 또한 주님의 교회도 존재할 이유가 없고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오래도록 수고하며 땀 흘리며 십자가 지는 삶을 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영생을 얻고, 우리 스스로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천국을 차지할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정말 사실일까요? “아! 어리석음이여! 흙덩어리인 인간에게는 완전무결한 행위가 없을진대 어찌 그 행위로 완전한 곳, 영원한 곳, 천국을 누리겠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 행위의 기준은 어느 정도인가? 얼마만큼 선행을 하여야 천국을 갈 수 있다는 것인가?”
* 디모데 후서 1장 9-10절에서 사도 바울이 명명백백하게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참으로 그렇습니다. 구원과 영생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자기 행위! 자기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주신 은혜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과연 누가 무엇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넘어설 것입니까? 오직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주에게서 주에게로 입니다.
* 가톨릭의 수장인 프랜시스교종이 지난 몇 칠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를 당한 유족들을 만나고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을 만나는 등, 소외되고 아프고 상처 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위로하고 축복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뉴스매체가 이러한 일들을 보도하면서 그분을 ‘낮은 자리에 임한 예수님 같은 교황’ 이라고 칭송하였습니다. 또한 수만 명의 가톨릭 신자들은 “비바! 파파! 교황님 사랑합니다.” 라고 하며 그를 추앙하였습니다. 저는 그러한 소식들을 잠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과연 그분이 존경하고 그 삶을 따르기고 결심했다는 성 프랜시스는 오늘의 그의 모습을 어떻게 바라볼까? 성 프랜시스라면 과연 그렇게 하였을까? 수만의 대중 앞에서 박수 받고 추앙받는 일! 말입니다. 그리고 과연 예수님께서는 이 시대의 아픔과 고통과 환란을 당한 사람들에게로 오신다면 과연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 교황으로 즉 교회의 황제로 높임 받는 저런 모습을 과연 어떻게 바라보실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너무 비판적인가요?
* 저는 프랜시스 교종께서 살아온 삶을, 그리고 그분이 베푼 선행을 비하하거나 깎아 내리려는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그분의 선행은 익히 알려진바 대로입니다. 심지어는 바티칸에서 지불하는 비행기 값을 빈민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을 정도였다니까 말입니다. 저는 다만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정말 프랜시스 교종이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온전히 실천하기를 바란다면 모든 권세와 힘, 그리고 모든 정치적인 권력의 자리인 정치인보다 더 정치인인 교황의 자리에서 내려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평범한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 자신의 삶의 모델이라는 성 프랜시스처럼 말이지요. 정말 그분이 정치적인 모든 의도를 제외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순전하게 실천하고자 한다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소외되고 낮은 곳을 스스로 찾아가 이름도 빛도 없이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분은 왜 전 세계에 200명도 안 되는 추기경이 되었을까요? 그분은 왜 유일한 교황의 자리에까지 올랐을까요?
* 제가 늘 강조하는 말씀처럼 믿음은 말에 의한 것이 아니라 행위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은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가 왜 세상으로 부터 지탄을 받고 개독교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입니까? 믿음은 말하면서 믿음의 결실인 삶의 실제가 행위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장 14-17절에서 말씀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참 그리스도인에게서의 선행! 즉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은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이웃사랑의 삶을 반드시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할 절대 진리는 그 어떤 사랑의 실천일지라도 그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뿐입니다. 행위가 아닌 은혜입니다. 사도행전4장 12절에서 말씀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예수그리스도!!! 그는 우리 흙덩어리인간을 하늘에 이르게 하시는 유일의 사랑의 구세주!!! 은혜의 구원자이십니다.
*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채색 옷을 입을 만큼 특별한 사랑가운데 살던 요셉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들에 의하여 은 20개에 고난의 대명사인 노예로 팔렸습니다. 이제 그의 삶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노예의 삶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라는 것이며 동시에 ‘고난과 고통이 연속되는 비참한 삶이 될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팔아넘긴 후 숫염소를 잡아 그 피에 요셉이 입던 채색 옷을 적신 후에 아버지 야곱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의 그 피 묻은 채색 옷을 보고 자신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날 동안(many days) 깊은 애통 속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그 누구도 위로 할 수없는 애통으로 요셉을 그리워합니다.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창37:35) ‘라헬의 내 아들! 요셉을 따라 나도 죽겠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그리움은 죽음을 넘어설 만큼 강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지 않겠습니까? 최고로 사랑하던 여인 라헬이 남겨두고 간 아들이 졸지에 죽음을 당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니요. 밥을 먹어도, 일을 해도, 앉아도, 누워도 오직 한 가지 생각, 요셉에 대한 그리움으로, 다시 만나고픈 소원으로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소원! 그리고 노예로 팔린 아들의 소원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오늘이라는 삶의 자리에 서있는 우리들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 이스마엘 상인들의 손에 의해 팔려온 요셉의 삶은 거친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의 돛단배 같았습니다. 불안하고 고뇌가 가득한 삶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요셉은 그런 가운데서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아버지 야곱의 하나님을 여전히 의지하며 신뢰하였습니다. 그래서 ‘보디발의 아내’ 라는 유혹의 풍랑 앞에서도 목숨을 건 싸움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설령 죽더라도 아버지의 하나님을, 그 분의 뜻을 잃지 않겠다.’ 는 의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과 율례대로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결국 감옥이라고 하는 인생의 가장 험난한 골짜기까지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채색 옷을 입던 가장 사랑받던 아들에서 노예로 추락했고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노예에서 감옥인생으로 추락했으니 말입니다. 만일 날개가 있다면 다시 비상 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있었을 텐데.........요셉에게는 날개가 없었습니다. 과연 누가 그를 그 추락한 자리에서 다시 날아오르게 할 수 있을까요? 또한 오늘 우리들의 삶을 더 높은 곳으로 들어 올리실 분은 누구일까요?
* 이제 우리는 몇 가지 진지한 질문을 던져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노예를 거쳐 감옥에 갇히는 그 비참한 삶, 버림받은 삶을 살면서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이 살던 집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요? 하루하루 견디기 힘든 죽음이 기다리는 그 감옥 한가운데서 아버지의 사랑에 얼마나 목말라 했을까요? 요셉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 그리고 그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과 고통, 아픔과 눈물은 그 가정, 가문을 선택하여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뜻과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오늘 본문 5-8절에서 말씀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아! 고난이여! 아픔이여! 눈물이여! 십자가여!.......그리고 하나님의 뜻이여!!!
♬죽음의 길을 벗어나서 예수께로 나옵니다 영원한 집을 바라보고 주께로 옵니다 멸망의 포구 헤어나와 평화의 나라 다다라서 영광의 주를 뵈오려고 주께로 옵니다.♬
*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하나님의 상속자로 살아가는 우리성도들의 삶에 과연 우연이란 있을까요? 우리가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나고, 우연히 오늘을 살며, 우연히 죽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계신 전능자의 손에 붙들린 우리성도들의 삶은 어제의 지나간 일이나, 오늘에 속한 일이나, 내일 이루어질 모든 일들이 모두 하나님의 필연적 역사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성취될 삶이라는 것입니다.
* 이제 이런 질문을 드립니다. 어제까지 걸어온 여러분의 삶,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의 인생, 그리고 내일 살게 될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을 하늘의 상속자로 삼으신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오늘 로마서의 본문 36절에서 말씀합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