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수요일, 6구역구청과 시청 그리고 6구역 경찰국을 다니며 일을 마치고 블라허 루이자 지하광장에서 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서부역에서 사역할 때 가끔씩 들러 인사도 하며 한국 돈으로 2.500원을 주고서 도망치듯 서둘러 가는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노숙인은 아니지만 넉넉히 않기에 500포리트 도 그에게는 아주 소중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도 제게 오더니 천포린트를 건네주는 것이었습니다. 천포린트는 이곳의 서민들에게 적지 않은 물질입니다. 한참 실랑이를 벌이며 돌려주려 하였지만 결국 제가 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아주 작지만 주님의 일을 위하여 사용하여 주십시오.” 자신도 늘 부족하고 모자랄 텐데 아들도 이제는 돈을 번다하면서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나누는 그 삶 그 영혼을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바라보실까요?
*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4절의 말씀에서 이 편지를 받고 읽을 사람들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즉 에베소, 서모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러나 일곱 교회는 단지 일곱 교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창세기의 천지창조에서 알려주듯이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이기 때문에 이 편지의 수신자는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당시 아시아에는 위에 기록된 일곱 교회 외에도 골로새(골1:2), 히에라폴리스(골4:13), 드로아(행20:6-7)교회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계시록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그리고 교회로 부름 받은 모든 시대, 모든 성도들을 향하여 주시는 약속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오늘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로, 성령의 전으로 부름 받은 존재인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는 이 계시의 말씀을 오늘 나를 향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이 말씀이 나의 말씀이 되고, 이 말씀 속에서 역사하는 힘과 능력이 나 자신의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 말씀 속에서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바로 자신의 삶속에서 성취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임한 이 계시의 말씀을 여러분의 말씀으로 받으십시오. 그리고 이 말씀이 성취될 삶으로 살아가시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이제 우리는 본문 5절 가운데 기록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한 말씀에 대하여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은혜”를 헬라어로는 “카리스”라 합니다. “카리스”의 의미는 한 사람의 선과 악, 높고 낮음, 옳고 그름 등의 모든 조건과 전제가 배제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당신 자신의 뜻으로 거저 주시는 무한한 사랑과 선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최고봉은 예수그리스도이시며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죄악으로 멸망당하지 않고 영생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자신이 친히 우리 사람과 같이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내려오셔서 영생에 이르는 떡과 음료인 자신을 아낌없이 다 쪼개어 주신 것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6:51)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모두에게는 이 보배롭고 거룩하며 측량할 수없는 은혜가 임하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십자가구속의 은혜가 임하지 않는다면 육체를 입고서 날마다 죄와 허물을 산더미 같이 쌓아가는 우리의 운명은 과연 어찌 되겠습니까?
♬.......아! 전능자의 은혜여! 아버지의 은혜여!........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 이제는 우리는 “평강”에 대하여 알아보아야겠는데요........ “평강”을 헬라어로 “에이레네” 라 합니다. 평강은 인간적인 노력과 어떤 수련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인간이 끝없이 노력하고 수련을 쌓는다고 해도 평강은 얻을 수 없습니다. 다만 마음에 위안을 받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위안 이기 때문에 금세 무너져 내립니다. 사도요한이 말하는 “평강.......에이레네” 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즉, 예수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에게서만 경험되어지고 성취되어지는 풍요로운 영적 상태와 화목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이제 저는 제 자신의 주인 됨을 포기합니다. 저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오니 저를 통치하시고 이끌어 주십시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로 충만한 사람들을 보면 세상에서 그 어떠한 광풍이 몰아친다고 하여도 평안 가운데서 여전히 목적지를 향하여 전진하여 가는 빛나는 모습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잠도 뒤척이지 않고 깊은 잠을 자며, 입가에서는 찬송이 떠나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뚫어지게 보는 것입니다. 소망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 진리요 생명이요 사랑이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더불어 사는 성도! 그들은 물질의 광풍이 몰아치든지, 질병의 회호리가 몰아치든지, 실패와 좌절의 광풍이 몰아치든지 그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평강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 자신으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사막과 같은 이 거친 세상, 험산 준령을 넘는 것 같은 인생살이를 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평강이 없다면 그 삶과 마음이 그리고 그 영혼이 어찌 되겠습니까? 은혜와 평강!!!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흙덩어리 인생들을 향한 최고의 선물이요 유일무이한 보물입니다.
* 그런데 사도요한은 이 보배롭고 거룩하며 측량할 수없는 하나님의 선물과 보물인 은혜와 평강을 성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알아보아야 할 것은 사도 요한이 밝히는 성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성령 하나님은 누구이시며 그리고 성자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되겠습니다.
* 먼저 사도요한은 성부하나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이시라/ who is, and who was, and who is to come”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불변하시고 언약하신 바를 결단코 실행하시는 분으로써 온 우주와 세상에 대하여 창조주로 통치자로 완성자로 존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생들의 삶과 죽음, 저주와 복을 주관하시며 특별히 택하신 그의 성도들을 향한 영생에 대한 약속을 실행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 읽고 묵상할수록 우리는 오늘을 사는 힘을 얻게 되고 내일을 소망하는 능력으로 서게 됩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 그 영광의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저의 삶의 자리에 매 순간 역사하여 주셔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 이제우리는 사도요한이 밝히는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그는 성령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사도 요한은 왜 성령을 일곱 영이라 했을까요? 그것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계시록에서 사용되는 일곱 숫자가 들어있는 용어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일곱 촛대, 일곱 별, 일곱 교회, 하나님의 일곱 영, 일곱 등잔, 일곱 인, 일곱 뿔, 일곱 눈, 일곱 천사, 일곱 나팔,....... 그 외에도 여러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사야서 11장 2절 말씀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이러한 용어와 말씀의 의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일곱 영의 의미는 성령의 권능, 성령님의 행하심이 한 치의 틈이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완전하고도 거룩하며 실제적이라는 것입니다. 혹시, 오늘 우리가운데 절망하며 아파하며 불안가운데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으로 부터 임하는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완전하고도 거룩하며 실제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간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삶을 통치하실 것입니다.
* 이제 우리는 사도요한이 밝히는 성자 예수님에 대하여 알아보아야 합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충성된 증인!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 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증언 속에서 우리가 깨닫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충성된 증인은 생명까지도 십자가의 죽음으로 온전히 바치며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성취 시킨 분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이라는 것은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영생으로 이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이라는 것은 세상의 모든 힘 있는 자들을 통치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바로 이러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와 평강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성삼위일체하나님으로부터 약속되어지고 부어지는 우리인생들을 향한 최고의 선물과 보화인 은혜와 평강의 강수가 지금도 거침없이 흐르고 있음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구하고 받으십시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 하신 축복을 성취하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이제는 우리는 본문 7절의 말씀으로 함께 생각해 볼 차례입니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우리가 이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온 몸에 전율을 느끼며 감동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구름타고 다시 오시리라 하신 재림의 영광이 예수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에게 성취 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사도행전 1장 11절, 요한복음 14장 3절.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가운데서 하늘로 올려 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우리성도들의 영광의 구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은 세상의 모든 기준과 가치가 완전하게 무너져 내리는 시간이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 목숨 걸고 살던 사람들이 깨닫고 후회하는 시간이 됩니다. “아!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었구나! 그렇게 생명처럼 여기던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었구나! 정작 중요했던 것은 따로 있었구나. 헛된 영광을 구하고 살았구나! 그토록 아끼던 것이 쓰레기가 되어버렸네.” 그러나 이러한 세상 사람들의 뒤늦은 깨달음과 후회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땅을 치며 애곡하게 되는 재앙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 마태복음 24장 50-51절에서 말씀합니다.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미 돌이켜 회개할 시간, 새 삶을 살아 갈수 있는 길을 충분히 열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일에 목숨 걸고 살았기 때문에 그 삶에 대한 값을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했다는 것은 육체에 속한 삶이요, 육체에 속한 삶은 사단의 노예였기에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으로 눈부신 그 나라에 합당하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버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재림의 날은 들림과 버림이 교차하는 엄연한 시간이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의 필연적 시간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날과 그 시는 알 수 없으나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달고 더욱 깨어있는 삶과 신앙으로 살아서 공중으로 들림 받고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아! 재림신앙이여! 깨어있는 삶이여! 들림 받는 축복받은 영혼이여!
*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올 해 2014년 4월 20일 부활절을 앞두고서 로마 교황청의 대변인인 Giorgio Salvadore 추기경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상황에선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약속을 주신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시면서 많이 지치셨을 겁니다. 요한복음 14장에 기록된 ‘다시 오실 것’ 이라는 약속을 주셨을 당시 아마도 예수님은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을 겁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일에는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있지요. 우리도 술에 취했을 때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http://waterfordwhispersnews.com/2014/04/18/jesus-not-coming-back-by-the-looks-of-it-admits-vatican/
* 형제자매 여러분! 로마 교황청의 추기경이라는 사람이 쏟아낸 이 말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도대체 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 예수그리스도를 깨달은 사람인지, 과연 로마교황청의 정체는 무엇인지 심각하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3-5절에서 말씀합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 그렇습니다. 로마교황청 가톨릭은 말세에 그리스도를 조롱하는 사람들입니다. 진리를 왜곡시키는 거짓과 미혹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들의 영광으로 가로채고 있는 정욕의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세상에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까지도 술에 취한 말로 바꾸어 버리며, 예수님을 술꾼으로 몰아가는 이 참담한 일을 어찌해야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재림이 존재하지 않는 기독교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재림을 빼고서 도대체 성경을 어떻게 풀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또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지 않은 신앙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추기경이라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취중실언으로 만들어 버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이 아주 가까이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두움아! 사단아! 이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무너져 내릴지어다!!!”
* 지금도 온 세상을 향하여 선과 악을 심판하시며 진리와 거짓을 가르시고, 양과 염소를 구분하시며 들림과 버림을 입게 될 시간이 급하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의 그날은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라고 말씀한 것처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눈으로 확인하게 될 하나님의 날이요 성도들의 날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날 그 시간에 대하여 준비되어 있습니까?
*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