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상남도 거창에 자율형 사립학교인 거창고등학교가 있습니다. 전교생이 360명인 시골학교인데 모두가 기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학교는 교복도 없고, 학생들에 대한 통제도 없고, 과외도 없고 입시설명회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학생들의 자율성에 맡기고 교사는 학생회가 결정한 사안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 학교의 기본 운영 방침입니다. 그래서 자칫 학생들이 공부도 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 시킬 수 있다 여기는데 오히려 이 학교는 전국에서 가장 높은 대학진학률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수한 학생들이 전국에서 모이는 유명한학교가 되었습니다. 졸업생 114명 가운데 113명이 우수한 성적으로 4년제 대학에 합격할 정도니까 말입니다. 거창고등학교의 교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 으로 1953년에 설립된 기독교학교입니다. 그런데 이 학교가 입학률이 높은 것 이상으로 소문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거창고등학교의 십계명이라 불리는 “직업을 선택할 때의 십계명” 입니다. 무엇을 말하는지 귀를 기울여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제 1계명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제 2계명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제 3계명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제 4계명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제 5계명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제 6계명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제 7계명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제 8계명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제 9계명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제10계명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어떻습니까? 우리 성도들이 살아가야 할 삶이요 세워져야 할 삶의 자리가 아닐까요? 만일 우리 한국교회와 성도가 이런 자세로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했다면 과연 오늘의 한국사회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그리고 다시금 우리가 그러한 자세로 오늘의 세상에서 존재한 다면 세상은 과연 어떻게 달라지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보셨습니까? 삶에서 증언되어야 합니다.
* 오늘도 우리는 지난주에 이어서 사도요한이 환상 중에 뵌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그 영광스런 주님이 우리들의 삶에 그리고 온 세상에 어떻게 역사하시는지에 대하여 깨달아 보아야겠습니다.
* 지난주에 우리는 “인자 같은 존재” 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두른 존재” 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먼저 그 셋째로 “머리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은” 같은 존재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으로써 예수그리스도를 표현한 것인데 그분의 신성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이러한 전능자의 모습을 다니엘도 보았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단7:9) 성경에서의 흰색은 순결함과 정결함 그리고 권위와 영광을 상징합니다. 그러기에 “머리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라고 한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순결함과 거룩함 그리고 권위와 영광을 입은 영원한 신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너무도 거룩하고 순결하셔서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이십니다.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고 하늘과 땅이 만날 수없는 차이 그 이상의 차이입니다. 그런 그분이 친히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시고 그 신성의 능력으로 약한 자는 강하게 하시고, 억압받는 자는 자유하게 하시며, 죽을 생명을 살려주시는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 일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그 영광의 하나님을 믿고 따름으로 의인이 되어(창15:6) 믿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그 권능의 손에 이끌려 애급의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해가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그 영광의 하나님을 힘써 찬양하다가 하나님마음에 합한 왕이 되었고 예수그리스도를 모시는 핏줄까지 되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그 거룩하고 순결하신 주님의 손에 사로잡혀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스라엘을 넘어 이방 땅에 까지 증언하는 사도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밖에도 무수한 사람들이 “머리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은 존재” 이신 그리스도께 사로잡혀 인간을 뛰어넘어 신 같은 존재의 삶을 살았습니다. 흙덩어리인 인간이 하나님께 사로잡히면 전능의 일을 행하는 신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 인류의 역사가운데 지금도 도도히 흐르는 진리인 것입니다.
* 형제자매여러분!
이제 우리는 우리자신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이 “머리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은” 거룩함과 순결함 그리고 권위와 영광을 입으신 주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는다면 과연 어떤 삶을 살며 어떻게 쓰임 받게 될 것인지 말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조상이 필요합니다.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다윗과 같은 인물이 필요하며 사도바울처럼 쓰임 받을 인물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 시대에 그 반열에 오르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은혜와 복을 누리는 것을 바라만 볼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제가 그 영광의 주인공이 되는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손에 사로잡히기를!!! 그 영광의 임재 속으로 매 순간 들어 갈 수 있기를- 아멘 아멘”
* 이제 우리가 넷째로 알아보아야 할 것은 “그 눈은 불꽃같은 존재” 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예수그리스도 안에 내재된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 아시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단10: 6) 주님은 모든 것을 꽤 뚫어 아시는 그 불꽃같은 눈으로 모든 성도들의 길을 밝혀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으로 사는 사람은 넘어질 일에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어두움 속을 지날 때도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충만함으로 다 아시는 그 불꽃같은 눈으로 오늘의 삶을 살펴주시고 내일의 문을 열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빛난 눈으로 세상 끝날 까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마28:20) 그래서 어두운 눈을 가진 양과 모든 것을 밝히 아는 선한 목자의 관계가 바로 주님과 우리 인생의 관계인 것입니다.
* 또한 주님께서는 그 불꽃같은 눈으로 세상의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의 역사를 꿰뚫어 보시고 그들을 세우기도하시고 망하게도 하시며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십니다. 인류의 역사 그리고 한 개인의 삶의 역사를 둘러보십시오. 그리스도의 그 빛난 눈을 피한 나라와 민족이 어디 있었으며 그리고 개인이 어디 있었습니까?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을지라도 예수그리스도의 눈을 피할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꽤 뚫어 아시기에 제할 것은 아낌없이 제하시고 세울 것은 높이 세우셔서 당신의 공의와 사랑과 뜻을 반드시 열매 맺으십니다.
* 오늘도 주님께서 어느 미세한 것 하나 놓칠 수없는 빛난 눈을 가지시고 여러분과 저의 삶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어두움과 환난과 온갖 부정과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걸려 넘어지지 아니하도록 또한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도록 도와주고 계십니다. 역대하 16장 9절에서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형제자매여러분! 여러분과 저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온전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과 저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전폭적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눈에 가득 찬 존재가 되어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며 그 결실을 이루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이제 우리는 다섯째로 “그 발은 풀무에 단련된 빛난 주석 같은 존재”에 대한 의미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이것의 의미는 예수그리스도의 신적인 위엄을 나타내는 표현으로써 흠과 티가 전혀 없는 절대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다니엘도 그가 본 전능자의 모습을 이와 동일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단10:6) 여러분! 수천도가 넘는 용광로에서 제련된 주석이 어떨까요? 흠과 티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강도는 절대적인 것이 됩니다. 그러기에 용광로에서 제련된 주석 같은 발에서 벗어날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신바대로 재림주로 다시 오십니다. 그때는 처음오실 때와는 다르게 인간의 연약한 몸을 입고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전능으로 심판을 들고 오십니다. 그러하기에 그날에는 그분의 주석 같은 발에 세상의 모든 악과 권세가 완전히 짓밟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발로 자기의 영광만을 구하며 다니던 사람. 하나님주신 발로 세상의 즐거움만 쫓아 뛰어다니던 사람, 하나님주신 발로 복음전도자들을 걷어찼던 사람들은 그날에 주님의 발에 짓밟히게 되는 것입니다. 꿈틀 댈 수도 없습니다. 부활의 빛난 발을 가지신 분과 세상을 따라 살아간 사람들의 발이 너무도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주신 발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걷고 뛰었던 사람. 하나님주신 발로 주님의 생명의 복음을 위하여 산과 강을 건너며 이리저리 터지고 상한 발을 가진 사람 그들만이 재림의 그날에 주님의 편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닮은 발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발은 어떻습니까? 세상을 닮았습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걸으셨던 길을 가느라 다 터지고 상처나 있습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발이 십자가의 길을 걷는 용광로에 제련된 것 같은 발이 되지 않으면 결코 주님의 곁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발을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그 발로 주님이 걸으셨던 길로만 걸어야 합니다.
* 이제 우리는 여섯째로 “그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은 존재” 에 대하여 알아보아야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전능자의 음성을 의미합니다. 에스겔1장24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생물들이 갈 때에 내가 그 날개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와도 같으며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으며 떠드는 소리 곧 군대의 소리와도 같더니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내렸더라.” 그렇습니다. 야훼하나님의 음성은 상황과 환경에 따라 때로는 많은 물소리처럼, 때로는 수많은 무리들의 소리처럼, 때로는 군대의 소리처럼, 때로는 천둥번개소리처럼, 때로는 나팔소리처럼 울려 퍼지며 하나님자신의 계획하심과 뜻하심을 사람들 사이에서 성취 시켜 가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셨습니까?
* 하나님께서 금하셨던 선악과를 먹고서 동산나무사이에 숨어있던 아담을 부르시던 하나님의 음성은 어떻게 들렸을까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엄위하시고 단호하시며 안타까움과 슬픔과 분노가 섞인 음성으로 들려지지 않았을까요? 또한 홍수심판이후 377일 만에 방주의 뚜껑을 열어 제친 노아에게 들려주신 하나님의 음성은 어떠했을까요?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창8:16-17) 새 창조의 소망과 기대와 의지와 축복이 담긴 전능자의 음성이 아니었을까요? 또한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도망가서 20년의 고난의 세월을 보낸 후 그에게 들려주신 하나님의 음성은 어떠했을까요?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창31:13) 언약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신실한 음성, 택하신 사람들을 축복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소망의 음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위로와 소망의 말씀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책망과 분노의 말씀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심판의 말씀으로, 또 어떤 사람에게는 승리와 기쁨의 말씀으로 그 음성으로 들려주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의 약속하신 길을 따라 걷는 여러분과 제가 들어야 할 음성은 어떤 음성일까요? 오늘 우리가 처한 각자의 삶의 자리에 전능자께서 들려주실 음성은 과연 어떤 음성일까요? 여러분은 주님의 어떠한 음성을 듣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되 부드럽고 온화하며 소망 가득한 음성, 생명가득 축복 가득담긴 음성을 듣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형제자매여러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본 사람은 사도요한처럼 그 자리에서 죽은 자처럼 되어버립니다. 그 영광이 너무도 엄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보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죽어야 합니다. 죽어야만 새 삶으로 다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이것은 오늘 우리가 뵌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