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화요일, 성도님들께서 특별 헌금하여 주신 것과 교회 재정을 통하여 마련한 130벌의 방한복을 노숙인들께 잘 나누어 드렸습니다. 방한복을 나누기 전, 그 분들께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에게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께만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저는 진실로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 가난하고 낮은 사람들이 드리는 진정한 감사와 찬양을 우리 사람들이 가로챌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이 드리는 진실한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 받으실까? 여겼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서의 감사와 헐벗은 사람들에게서의 찬양은 과연 어떨까요? 순전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만 돌려드려야 합니다.
* 어려운 가운데서도 정성을 다해 매년 특별헌금을 하여 주시고 직접 거리에 나오셔서 수고해 주신 모든 성도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기뻐 받으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 헌신의 삶에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의 삶과 천국의 삶에서 은혜와 은총으로 가득 채워주실 것을 믿습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에게 간절하게 소원합니다. 우리가 한국이든, 헝가리든, 세계 그 어느 곳에 있든지 우리의 전 생애가 그리스도의 마음이 되고, 그리스도의 손이 되고, 그리스도의 발이 되어 배고픈 사람은 먹이고, 헐벗은 사람은 입히며, 눈물 흘리는 사람에게 위로가 되고, 병든 사람에겐 치유가 되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어떤 헌신을 하던지 결코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고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참 신앙인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 도적질하지 않고 불의 하지 않으며 간음하지 않는 바리새인의 생활은 실제였습니다. 쉽지 않은 생활이었음에도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금식을 하였고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소득의 십일조를 정확하게 드렸습니다. 오늘날의 성도들 중에서 그렇게 생활 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불의와 토색과 간음하지 않는 생활 그리고 매주 두 차례씩 금식을 하며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말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참으로 본받을만하고 칭찬할 만한 생활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이런 바리새인들이 허가 낸 도둑으로 불리며 탐욕과 불의로 가득해서 손가락질 받던 세리보다도 “의롭지 않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 본문 14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참 의미 가득한 말씀입니다.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던 세리가 도적질도하지 않고, 불의 하지도 않으며, 간음도하지 않던 바리새보다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도대체 세상에 이런 역전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어찌 보면 거의 완벽한 생활을 하고 있던 바리새인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왜 세리보다 “의롭지 않다.” 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의 절대적인 근거는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심판!” 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사람의 외적인 행위가 아닌 내면의 상태에 집중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은 보여 지는 행위가 아닌 삶의 결실에 그 중심 추를 놓기 때문입니다. 의로움에 대한 판단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세상 모든 사람은 그분의 눈, 전능자의 심판아래 놓여있습니다. 과연 하나님 앞에 놓여있는 우리들의 삶은 어떤 판단을 받을까요? 역대상 28장 9절에서 말씀합니다.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오늘의 나의 내면은 어떻습니까?
*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기보다는 타인의 죄과를 들추며 그들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행위가 지극히 의롭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본문 11-12절에서 기록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이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여러분! 진정한 기도를 하는 사람은 자신을 돌아볼 뿐 타인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기도를 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악을 돌아보며 통회하고 자복할 뿐 결코 자랑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인 행위는 타인과 비교하여 설령 자랑할 만한 것이 혹 있을지 몰라도 내면은 언제나 부끄러운 죄악을 가득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 시편 65편에서 말씀합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내가 나의 이웃보다 높게 여기며 우월하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까? 이 땅의 삶을 사는 동안 우리는 언제나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오늘을 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끊임없이 용서하시며 긍휼히 여겨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것입니다. 결코 행위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랑, 우리의 의로움, 우리의 기쁨, 우리의 높음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가슴 깊이 채우고 또 채워 주신 삶을 완성해 가야 합니다.
* 구세군 최초의 미국인 감독관을 지낸 ‘사무엘 로간 브랭글’ 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878년 영국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부스가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과 함께 빵을 나누어야 한다.’ 며 창설한 구세군이 그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 세계 도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왔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한때 주교가 되려고 꿈꾸던 명망 있던 한 미국인 목회자도 있었습니다. 그는 구세군에 입대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윌리엄부스는 그의 입대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겸손을 가르치기 위해서 다른 훈련병들의 군화를 닦는 일을 시켰습니다. 브랭글이 명망을 얻던 목회자로 겸손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실망한 브랭글은 “내가 기껏 남의 군화나 닦기 위해서 대서양을 건너 왔단 말인가? 내가 누구데?” 하며 맘 상해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주님의 환상이 보였습니다. 거칠고 무식한 어부들의 발을 씻기시려고 허리를 숙이고 계신 예수그리스도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가 외쳤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그들의 발을 씻기고 계시군요. 그렇다면 저도 이제 훈련병들의 구두를 닦겠습니다.” 주님의 환상을 본 후 브랭글은 더욱 녹아졌습니다.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다른 동료들의 군화를 닦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앞에서 그 자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완전하신 분, 주님께서도 그렇게 섬기셨는데........하물며 죄인인 내가 그 무엇을 못할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자신을 타인이 아닌 십자가의 예수그리스도께 세우면 우리는 언제나 낮은 마음, 순종하는 마음, 충성하는 마음으로 삶을 채워가게 됩니다.
*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그러기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표준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표준이 예수그리스도라 함은 그 어떠한 말을 하든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 어떠한 행위를 하든지 주님께서 행하시는 것처럼 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를 표준삼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어떤 선한 일을 하든지 언제나 부족함과 모자람을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결코 자신에게서는 자랑할 만한 것을 찾지 못합니다. 이웃에게 먹을 양식을 나누었어도, 자신이 아끼던 옷을 주었어도 또한 병든 사람을 찾아가 위문하였어도,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이토록 큰 은혜를 주셨는데 저는 너무 적은 것을 나누었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도적질하지 않고, 악한 일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아도..........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해도, 십일조를 드려도 여전히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그 무엇을 자랑 할 것입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 형제자매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의 표준은 누구이며 무엇입니까? “저 사람은 나보다 훨씬 못해. 저 사람의 행위를 봐. 어떻게 저렇게 큰 죄를 짓고서도 숨을 쉬고 살지? 나 같으면 부끄러워서 다니지도 못할 텐데...........” 여러분!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지 마십시오. 혹 압니까? 내가 무시하는 그 사람, 나보다 못하다고 은근히 깔보는 그 사람의 마음이 전능자와 닿아 있는지 말입니다. 내가 죄인이라 여기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사람인줄 어떻게 알겠습니까? 나를 이웃과 비교하면 내가 죽습니다. 나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사람과 비교하면 교만해 져서 죽고, 나보다 잘한다고 여기는 사람과 비교하면 열등의식으로 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를 그리스도 앞으로 세우면 늘 살아납니다. 겸손하여서 살고, 섬김으로 살고, 충성으로 살고, 소망으로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 세리는 자신을 이웃과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타인과 자신을 비교했더라면 더 큰 도둑, 더 악질적인 사람, 더 큰 죄인들을 찾아냈을 것이고 그로인해 ‘자기 위안’을 삼았을 것입니다. “나는 그런대로 좀 나은 편이야. 저 사람들에 비하면 아주 나쁘지는 않잖아. 나보다 더 나쁜 사람도 많은 데 뭐” 그러나 세리는 하나님 앞에 그 자신의 삶을 세웠습니다. 그랬더니 성전의 앞자리가 아닌 가장 뒷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볼 수도 없는 지경까지 그 마음이 낮아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탄식하며 가슴을 치며 절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자신의 삶을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세워놓고 자신의 실제를 바라보는 사람은 그가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지, 얼마만큼의 지식을 쌓았던지. 혹은 어떤 재산을 소유했든지 그리고 그 어떤 신앙적인 행위를 하던지 결코 하나님께 감히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세상 그 어떤 사람도 조금의 의로움도 자랑할 수 없는 부끄러움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전능자신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볼 수도 없는 영광의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 인생에서의 진정한 싸움은 그 어떤 것도 아닌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자신과 싸운다는 것은 외적인 것이 아닌 내면의 것이지요. 그리고 내면의 것이란? 하나님으로 다져진 심령,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제련되어가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우리인생의 싸움입니다. 함께 생각해 볼까요? 하나님으로 다져진 심령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제련된 마음이라면 집의 크고 작음, 골프회원권의 있고 없음, 물질의 많고 적음이 그 삶의 행복을 결정할 수 있을까요? 진실로 어떤 한 사람의 내면이 하나님으로 정제되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통과되었다면 그에게서는 그 어떤 상황, 그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나님의 기쁨과 행복이 피어나며 그리스도의 힘과 능력이 발휘될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멋진 옷을 입었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내어줄 만큼 행복했을까요? 그는 억지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또한 사도바울이 최고의 자동차를 소유해서 그렇게 행복하게 사역했을까요? 그 자발적인 헌신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내면의 싸움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로 한 없이 낮아지며 그리스도로 목숨 거는 삶” 말입니다.
* 그러나 내면의 싸움이 아닌 외적인 싸움에 열을 올리는 사람은 처참함과 고단함의 상처, 그리고 비굴함과 추악함이 그가 살아가는 인생의 길이만큼 가득하게 됩니다. “저 사람은 집이 큰데 나는 작아. 저 사람은 골프회원권이 있는데 나는 이렇게 빈털터리야. 저 사람은 명품을 걸쳤는데 나는 이렇게 초라해.” 만일 이렇게 비교하며 산다면 일생동안 그가 받는 상처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또한 “저 사람은 낮아 그러나 나는 높아! 저 사람은 비천해. 그러나 나는 고귀해! 저 사람은 악해. 그러나 나는 이만하면 착해!”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이 비교하며 산다면 그 영혼이 얼마나 참혹한 상태에 놓이겠습니까? 60세를 살면 60년 동안, 80세를 살면 80년 동안 참혹해 지는 것입니다. 형제자매여러분! 이제 다시 질문을 드립니다. 과연 우리가 더욱 힘써 싸워야 할 싸움은 무엇입니까? 삶의 싸움!!!
*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 오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