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강절 둘째 주일을 맞이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모두 위에 그리스도의 강림의 은혜와 은총이 가득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오늘은 이런 질문을 드리며 증언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손 안에 300억 원의 돈이 여러분의 것으로 그냥 굴러들어 온다면 어떻겠습니까? 하루아침에 운명이 뒤바뀐 듯 ‘좋아라.’ 하지 않겠습니까? 아마 모두들 좋아서 어쩔 줄 모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젠 실제적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의 손에 들어온 그 300억 원의 엄청난 물질을 과연 어떻게 사용하시겠습니까? 300억 원! 아니 그 이상의 물질을 관리할 능력이 오늘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그 물질을 가치 있게, 지혜롭게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문제지 300억 원의 돈만 굴러들어와 봐라. 내가 어떻게 사용하는지 제대로 보여 주겠다.” 혹. 그런 마음 가지고 있습니까? 준비된 삶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인생을 세우고 높이며 그리고 승리하게 합니다. 그것이 물질이던지, 지위든지, 권력이든지 말입니다. 그러나 준비되지 못한 삶은 기회가 주어졌을지라도, 엄청난 복이 자신의 눈앞에 열려졌을지라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확장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기회와 복이 그 인생을 패망케 합니다. 준비되지 못한 삶이라면 말입니다.
* 지난 주 한 뉴스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미국에서 복권 1등 당첨으로 300억 원에 가까운 돈을 얻게 된 남성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거의 기절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약 300억 원의 돈을 받은 지 12년 뒤인 지난주에 전 재산을 탕진하고 호스피스 병동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 전과자로 일자리도 없이 최 하류 인생을 살던 에드워즈에게는 ‘대박로또’라 불리는 ‘파워 볼’에 당첨된 것이 그야말로 인생역전의 기회였습니다. 참으로 멋지고 보배롭게 살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을 받자마자 제일 먼저 고급세단인 벤틀리를 사고, 켄터키에 있는 160만 달러자리 저택을 구입했습니다. 또한 람보르기니 디아블로 등 여러 고급 승용차와 190만 달러 상당의 자가용 제트기도 구매했습니다. 그는 복권에 당첨된 해에만 상금의 절반을 써버렸고 심지어는 아내와 함께 마약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복권에 당첨된 후의 삶이 복권에 당첨되기 전의 삶보다도 못한 삶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랐다는 것에 있습니다. 돈 쓰는 재미에 빠져 살던 에드워즈는 결국 5년 뒤 상금 대부분을 써버렸고 지난 2006년에는 주택이 압류될 만큼 가난해지자 그의 아내도 그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빚에 시달리다가 호스피스병동에서 비참하게 숨을 거둔 것입니다.
* 여러분 어떻습니까? 돈이 멋지고 보배롭습니까? 돈이 생명일까요? 돈은 생명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식과 권력은 어떨까요? 지식과 권력이 생명일까요? 지식과 권력도 생명이 아닙니다. 생명의 사람이 돈을 쓸 때 생명의 일들이 일어납니다. 생명의 사람에게 권력이 있을 때 생명의 일들이 건설됩니다. 즉, 우리의 삶이 생명으로 날마다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생명으로 준비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진 모든 소유는 아무런 가치를 나타낼 수 없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은 생명으로 준비되고 있습니까?
* 기다림의 실제는 준비된 삶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다림의 전제는 약속된 일과 시간입니다. 뭔가 약속된 일과 시간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기다림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분명하게 깨달아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약속된 일과 시간에 대하여 삶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그의 기다림은 아무런 결실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약속된 일이 그 아무리 보배롭고 영광스런 것일지라도 또한 약속된 시간이 삶의 전부를 뒤바꿀 일 일지라도 생명으로 그 삶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약속의 영광, 약속의 축복은 그의 차지가 못됩니다. 만일 우리가 약속의 축복만 기다릴 뿐 준비된 삶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 마음에 품은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습니다.(창6:5) 사람이 창조주를 망각하고 생명으로 생명이 되지 못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아픈 마음 상한 마음을 뒤로 하시고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창6:7) 홍수심판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은 심판으로 머물거나 끝나지 않고 새로운 시작으로의 첫걸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새 창조의 시대를 위해 당시 의로움으로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노아와 그의 가족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약속은 마냥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원의 실제인 방주를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야 했습니다. 하루, 일주일, 일 년, 십년동안 짓는 것이 아닌 무려 약 백여 년 동안 길이 150m, 넓이 25m, 높이 15m 정도의 방주를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대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피와 같은 땀방울을 흘려야 했겠습니까? 또한 얼마나 많은 조롱을 받고 웃음거리가 되었겠습니까?
* 사람들은 하나님 밖에서 여전히 장가가고 시집가며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으로 그 소중한 생명을 허비하고 있었지만 노아와 그 가족은 묵묵히 하나님의 시간, 그 구원의 날을 자신들의 삶으로 성취하며 기다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다림의 결과는 새 창조, 새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창9:1) 그렇습니다. 여러분! 준비된 기다림은 그의 합당한 복을 열매 맺습니다. 준비된 삶은 그 시간이 언제일지라도 예비 된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기다림의 실제는 준비된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성경 속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슬픈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도 그 중의 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짧은 구절이지만 가장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두 남자가 밭에서 힘써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시간이 이르자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했습니다. 또한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시간이 이르자 한 여자는 취함을 입었고 다른 한 여자는 버려둠을 당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엄청난 긴장감과 긴박감이 흐르고 있지 않습니까? 구원의 날은 바로 그것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긴장감과 긴박감이 거침없이 흐르는 시간이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간입니다.
*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손에 붙들려 영광의 나라에 입성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손에 붙들렸다고 하는 것은 그의 삶에서 최고의 영광 그 이상의 영광이요, 승리 그 이상의 승리를 얻은 것입니다. 구원은 인생의 마지막영광이요 구원은 인생의 승리 그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세상살이에서의 눈물과 고통, 아픔과 고난과 수고가 한 순간에 회복될 뿐만 아니라 그 영광이 영원하게 됩니다. 데려감을 당한 이 사람, 취함을 입은 이 여인은 과연 인생이라는 밭에서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런 영광의 은혜를 입게 되었을까요? 여러분과 제가 바로 그 데려감을 당하고, 취함을 입은 사람이 반드시 되어야 합니다. 구원은 선택이 아닙니다. 필사적으로 매달려야 할 일입니다. 그런 은혜가 우리가운데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그 영광의 나라에서 우리서로 함께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그런데 데려감을 당한 사람, 취함을 입은 여인과는 달리 다른 한 사람, 다른 한 여인은 버려둠을 당했습니다. 밭이라는 곳에서 동일하게 땀 흘리며 수고했는데 왜 그 남자는? 왜 그 여인은? 버림을 받았을까요? 참으로 슬프고 비극적인 일입니다. 오늘 본문 42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Therefore keep watch!!!” 무슨 의미일까요? 준비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삶을 세상과 세상이 주는 것에 도적질 당하지 말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향하여 그 날에 합당하도록 삶으로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본문44절에서는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고 말씀하십니다. 깨어있으라! 예비하라!
*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진실로 깨어있습니까? 진실로 오늘 우리들의 삶은 주님의 날에 합당하게 준비되어있습니까? 혹 내 삶을 세상에 도적질 당하거나 강탈당한 채로 끌려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로 급브레이크를 걸어야합니다. 조금 더 가면 파산입니다. 조금 더 지체하면 파멸입니다. 미움이었다면 사랑으로 개혁해야 합니다. 주님처럼 말입니다. 불순종했다면 순종으로 개혁해야 합니다. 주님처럼 말입니다. 게을렀다면 부지런해야하고, 거짓 했다면 진실해야하고, 십자가를 피해 다녔다면 자진해서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그리스도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날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날은 피할 수없는 전능자의 약속하신 날입니다. 정녕 우리는 아버지만 아시나 반드시 이루어질 그날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기다림의 실제는 그 약속하신 날에 대한 준비된 삶, 예비 된 삶입니다.
* 이제 제가 읽어드릴 글은 자기 분야에서 나름대로 성공한 남편 그리고 십대의 두 딸과 함께 세상 부러울 것 없는 풍요로운 삶을 살던 이승아성도의 글입니다. 그러나 그의 남편은 안타깝게도 지난 2013년 10월 6일, 하나님의 품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한 때는 아름다운 집이 저의 가장 큰 자랑이었습니다. 심혈을 기울여 꾸민 아름다운 집. 잡지에 여러 번 나왔다고 자랑스러워했던 우리 집. 행여나 때가 탈까, 혹여나 먼지 탈까, 닦고 쓸고 했던 우리 집. 하지만 남편이 아프고 보니 제가 있을 곳은 궁궐 같던 우리 집이 아니라 몇 평 안 되는 비좁은 병실이더군요. 피곤한 내 한 몸 누일 곳은 푹신하고 안락한 라텍스 침대가 아니라 딱딱하고 좁은 보조 침상이더군요. 내 것이라 믿었던, 남편과 공동 명의로 되어있던 자랑스럽던 내 집도 알고 보니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라만 보아도 뿌듯했던 참으로 고운 접시들, 참으로 예쁜 그릇들 "난 왜 이렇게 꽂히는 게 많은지. 남들은 그릇이면 그릇, 가구면 가구, 옷이면 옷, 하나만 꽂힌다는데, 난 왜 이 모든 것을 다 갖고 싶지?" 라며 투덜대게 만들었던, 못 말리던 나의 그릇 사랑. 그 수많은 예쁜 그릇들도 남편과 함께 하는 병실에선 아무 소용이 없더이다. 제가 황량한 병실에서 쓸 수 있는 건 보잘 것 없는 플라스틱 접시와 종이컵뿐이더군요.
열다섯 자 붙박이장에 가득한 수많은 옷들과 제가 사랑해 마지않던 명품 백들. 이 또한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하는 병실에선 편한 추리닝과 레깅스면 족하더이다. 귀히 여기던 명품 백도 필요 없더이다. 어디 그뿐인가요? 이십년 넘게 나의 자랑이었던, 나를 빛나게 해 준다고, 나를 완전하게 해 준다고 믿었던 내 남편도 제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의사들은 말합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이 또한 내 것이 아니라고.
이젠 압니다. 내 분신, 내 사랑, 내 사랑하는 아이들조차 제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이 아이들 또한 그분이 제게 잠시 맡기셨던 선물임을 제가 잊고 있었네요. 이와 같은 이유로, 근심, 염려 또한 제 것이 아닙니다. 적혈구 수치가 모자라 수혈을 해도, 의사가 제 아무리 무서운 말을 해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 아버지의 것입니다...........근심, 염려는 다 주께 맡기고, 내 남편 또한 주께 맡기고, 저는 이 밤 또 기다립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인 양 소유하며 자랑하며 욕심내었던 제 무지를, 제 교만을, 제 과거를 회개하며 눈물로 기도합니다.”
* 오늘 본문 4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이것은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