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본문 10장 10절에서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 하였나이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과 더불어 사는 것은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낳습니다. 그래서 범죄 하면 생명이 죽음으로, 복이 화로 바뀝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세상의 세력,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무방비상태로 노출됨을 의미합니다. 노략거리요 밥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부족한 가운데서도 선하고 의롭고 아름답고 복된 일을 행할 수 있는 것은 단절의 휘장을 그리스도로 찢어놓으신 하나님의 손이 붙잡아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숱한 어려움가운데서도 승리하며 날마다 소망으로 견고히 살아가는 것은 그리스도로 죽음마저 정복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치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없는 삶, 그래서 죄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을 당하게 되며 그의 삶은 그야말로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자요, 부요한 것 같으나 가장 가난한 자요, 얻은 것 같으나 실상은 모든 것을 잃은 삶이 됩니다.
* 물론 하나님과의 단절이 모든 것으로부터 망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세상적으로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어 보입니다. 아니 오히려 세상 앞에 무릎을 꿇고 세상의 방식을 따라 살면 쉽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사단이 그리스도께 유혹하지 않았습니까?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4:8-9) 세상의 구조가 거짓, 불법, 시기, 교활, 교묘한 것에 수월하고 익숙합니다. 그러기에 세상의 방식으로 살면 쉽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요, 제한적이요 부끄러운 것입니다. 결국은 쥐고 있던 모든 것을 포함하여 그 영혼까지 잃고 맙니다.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 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 우더라“(계20:14-15) 그러기에 우리의 수고의 이유와 땀 흘림의 목적은 먹고 입고 마시고 잠자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닌 그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 앞에서, 오직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내동댕이쳐야하고 죄와는 목숨 걸고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과의 친밀, 그 깊은 진리와 생명의 관계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과 얼마나 친밀합니까? 그분이 내안에 내가 그분 안에 거합니까?
* 본문 10장 13-14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치 아니하리라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 환란 때에 그들로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혹,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이 계셔서 나를 이끄시도록 해야 할 자리에 하나님보다 더 높여 놓고 사는 것은 없습니까? ‘이럴 땐 하나님보다 이런 것이 더 현실적이야.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세상을 살아가려면 이런 것이 필요해요.’ 하며 마음속으로부터 신뢰하는 것은 없습니까?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라. cry out to the gods you have chosen ” 우리가 택한 우리의 신들은 일시적이고 제한적으로 옳고 힘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결코 우리의 궁극의 구원, 최후의 승리가 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마음에 신뢰하는 그것들은 환난 때에, 고난당할 때에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헛수고했구나.’ 하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물질이든 사업이든 명예든 지식이든 학벌이든 혹은 자기 자신이든지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고난당할 때 그들이 그토록 신뢰하던 바알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요? 오직 우리의 힘과 능력은 십자가 위로 오르시고 승리하신 예수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3:1)(룩셈부르크. 서인원목사, 직장암, 간암) 환난의 때에 나를 세우시고 견고케 하시고 마침내 승리케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이십니다.
* 본문 11장 1절을 보겠습니다. “길르앗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와 처해진 환경에 따라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분의 선택의 기준은 사람들의 것과는 다릅니다. 사람들의 기준은 잘난 사람, 높은 사람, 있는 사람, 가진 사람, 얻은 사람에게 높은 점수를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자신의 뜻을 완전케 하는 것에 그분의 기준이 적용됩니다. 때로는 낮은 사람을 사용하시지만 높은 사람을 사용하실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일들을 행하십니다.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을 사용하시지만 존경받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는 일들을 행하십니다.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을 사용하시지만 온전한 사람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열매를 맺으시며 그 의미를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사 입다도 마찬가지입니다.
* 이스라엘이 범죄 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되자 하나님께서는 입다를 들어서 역사의 무대에 세우십니다. 그러나 입다는 길르앗이 기생에게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기생이 낳은 아들이니까 얼마나 멸시를 받고 천대를 받았겠습니까? 기생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기에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당연히 받아야 할 은혜와 사랑을 누리지 못했고 그 기업을 이을 수도 없었습니다. 쫓겨나서 살 수밖에 없는 인생, 그래서 잡류라(a group of adventurers ) 일컫는 하류 인생들과 섞여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기생의 몸에서 태어난 입다의 처지였습니다. 눈물과 탄식이 그의 빵이 되고, 고난과 고독이 그의 음료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문 2-3절에서 우리는 입다의 삶의 처지를 일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길르앗의 아내도 아들들을 낳았더라.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쫒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이에 입다가 그 형제를 피하여 돕 땅에 거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아! 기구한 인생이여!!! 어쩌다가 기생의 몸에서 태어났을까? 누구는 기생의 몸에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나? 누구는 가난하게 태어나고 싶어 태어났나? 누구는 집시로 태어나고 싶어서, 누구는 흑인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누구는 병약한 몸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나? 그러나 생명은 그 자체가 신비입니다. 생명이 생명이신 분을 만나게 되면 신분에 관계없이 생명의 일들로 쓰임받기 때문입니다. 마른 막대기일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들리면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태어남이 아니라 가꾸어짐이 문제입니다. 그리스도로........
*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비천한 처지에 있는 입다를 환난에 처해서 전전긍긍하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향한 도구로 사용하셨을까요? 왜 하필 기생이 낳은 아들이요, 멸시받고 천대받는 사람이었을까요? 이스라엘에 과연 입다만한 사람이 없어서였을까요? 여기에 모든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잘난 사람, 높은 사람, 거룩한 사람으로 여기던 이스라엘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단절 때문에 생긴 가려진 눈, 어두워진 심령을 가장 비천한 인생이라 여기던 입다를 통하여 열어주고 깨우쳐주려하신 때문입니다. 작은 자를 통해 큰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연약한 자를 통하여 강한 자를 고치시려는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27-29) 육체가 육체 안에 머무르면 죽음이요 육체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생명이 됩니다.
* 하나님과의 단절은 환난을 낳습니다. 암몬족속이 이스라엘에게 환난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참패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입다를 찾아와 간청 합니다.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어 주시오.”(11:6) 자신들은 결코 기생의 자녀가 아니라고, 우리는 너와는 다른 온전한 사람이요,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으스대던 장로들이 어찌 기생의 아들이었고 잡류와 살던 입다에게 까지 나아와 머리를 숙일까요? 하나님께 선택받았다고 여기던 그들이 어찌 자신들의 손으로 “저건 하류인생이야!” 손가락질하던 입다에게 나아와 우리를 구해달라고 간구할까요?
그 장로들의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장로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이야기 했지만 삶의 실제에서는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 부끄러움이 그 머리위에 세워집니다. 하나님께서 계셔야할 자리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이 차지하고 있으면 환난이라 불리는 암몬족속은 여지없이 우리를 위협합니다. 장로가 아니라 장로의 삶이어야합니다. 성도의 이름이 아니라 성도의 삶이어야합니다.
* 입다는 비록 기생에게서 태어나 방탕할 수 있는 조건 속에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범죄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록 하류 인생을 사는 처지에 놓여 있었지만 그 중심에서 하나님과의 친밀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본문 11절에 입다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있습니다.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를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고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 안에 계시고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 안에 계십니다.(요14:10)
성령님도 그분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도 성삼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성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살아감을 의미합니다. 적당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친밀의 삶, 일치된 삶, 즉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구하며 살면 하나님의 영광은 그 삶속에서 거침없이 결실합니다. 그리하여 넘어질 상황에서도 오히려 견고하며, 실패할 환경에서도 오히려 승리하며, 작은 자가 큰 자보다 더 큰 자가 되며, 가난한 자가 부자보다 더 큰 부자가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의 능력이 그 삶을 통치하기 때문입니다. 친밀의 능력! “내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15:4)
*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나? 오늘 내 처지가 이게 뭐야? 내 인생엔 왜 이렇게 실패만 쏟아지나?” 던져진 삶의 처지가 문제가 아닙니다. 삶의 정신이 관건입니다. 기생에게서 태어났을지라도, 실패의 연속가운데 있을지라도, 모아놓은 것이 없을 지라도, 우상을 만드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을지라도,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지라도, 말째 아들로 태어났을지라도, 광야로 도망쳐 40년의 세월을 보냈을지라도, 세리였을지라도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영성이 문제입니다.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고하니라" 입다가 하나님의 손에 들려 시대 앞에 쓰임 받은 비결, 그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과 나누는 친밀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삶!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환난과 버림이요 하나님과의 친밀은 회복과 쓰임 받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친밀함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항상 묵상하고, 사랑하고 믿고 순종할 때 우리는 점점 더 그리스도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반영하게 된다. 그의 의지가 우리의 의지가 되고 우리는 그가 바라는 것만 바라게 된다.”(J.오스왈드 샌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