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원' 이란 이행을 전제로 한 하나님과의 약속을 의미합니다. 서원이란 히브리어로 이싸르 또는 네데르입니다. 이싸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 부정의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네데르는 서원하는 사람이 어떤 물질을 비롯하여 심지어 자신까지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약속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신앙은 고인 물처럼 머물러있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서원으로 확장됩니다.
서원의 이행은 더 깊은 신앙으로 그를 견고케 합니다. 신앙이 깊으면 깊을수록 전능자를 향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충성의 정도가 깊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약속합니다. “저의 삶 전부를 드리겠습니다. 저의 첫 아들을 주님의 종으로 드리겠습니다. 저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오직 주님만 섬기겠습니다. 저의 모든 재산을 주님을 위해서만 사용하겠습니다. 저는 주님의 복음을 들고 오지일지라도 달려가겠습니다. 주님께 이 생명도 드립니다.” 모두다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의 발로(發露)입니다.
* 서원의 최고봉은 목숨까지도 드리는 것입니다. 순교자의 피 흘림은 어쩌다 보니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겠습니다.” 하는 서원에 바탕을 둔 절대 신앙의 결과가 순교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께 대한 확신과 사랑이며 하나님께 대한 확신과 사랑은 서원으로 드려집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도 기도 중에 하나님께 많은 맹세, 즉 서원을 하였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분의 사랑에 감격하였기 때문에........ 십자가의 은혜를 감당할 길이 없어서 드린 약속들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충성의 서원 위에 서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헌신의 약속들이 마음으로부터, 혹은 입술로 계속 드려지고 있다면 그의 신앙은 지금도 불타고 있는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헌신의 약속이 중단되었다면 그 신앙은 점검의 대상이 됩니다. 오늘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서원은 어떻습니까?
*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 버가모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 교회는 그릇된 진리에 휩쓸려서 주님께 호된 야단을 당했던 교회입니다. 당시 버가모 지역에는 제우스를 비롯하여 여러 우상의 신당들이 있었습니다. 그곳들에서는 가증하고 음란한 제사들이 행해졌습니다. 니골라당은 무 율법주의자들로서 그릇된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이러한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버가모의 성도들을 미혹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니골라당의 헛된 가르침에 미혹되어서 하나님과 우상을 사이에 놓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버가모 교회에는 안디바 라는 성도가 있었습니다. 안디바는 니골라당의 가르침에 전혀 물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을 향한 순수 신앙, 절대 복음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니골라당의 그릇된 가르침에 넘어져 타협하며 살았지만 안디바는 타협을 거부하였습니다.
우리는 그가 어떻게 하나님께 맹세하였는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 종은 이 길로 끝까지 가겠습니다. 이 길이 참 복음의 길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과 우상이 어찌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목숨도 두렵지 않고 아깝지도 않습니다. 날 받아주시옵소서.” 그는 분명히 이러한 신앙의 약속을 드렸을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서원은 그의 순교가 보증을 합니다.
* 계시록 2장 13절에서 증언합니다.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전승에 따르면 안디바는 큰 놋 솥에 던져져서 천천히 가열하여 태워 죽이는 형벌을 받고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습니다. 진실한 서원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에 대한 조건 없는 충성과 헌신입니다. 순수 신앙, 절대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정결한 헌신으로 드려집니다. 그리고 서원의 최고봉은 순결한 순교로 열매 맺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그 어떤 것에도 타협하지 않으며 목숨까지도 이미 하나님께 맡긴 순수 신앙, 절대 신앙 맞습니까?
* 입다는 비록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고 자랐지만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께 듣는 친밀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시대와 역사의 무대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사명은 이스라엘에게 환란으로 다가온 암몬족속의 공격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암몬 족속과 무조건 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사신을 보내어서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사사기 11장 12-28절에서 우리는 입다가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하여 얼마나 탁월한 식견을 가졌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가 얼마나 진지하게 하나님에 대하여 통찰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잡류라 일컫는 소외계층의 삶을 살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핵심 계층의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능력을 배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입다의 등장은 결코 어쩌다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요셉처럼, 모세처럼, 다윗처럼 입다 역시도 영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 차근히 준비되었기에 부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은 준비된 자를 향해 지명(指名)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시대와 역사 앞에는 준비된 자가 쓰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오늘 우리는 준비되었습니까? 하나님께 부름 받기를. 오늘 우리는 준비되었습니까? 그분의 나라에 입성하기를.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롬13:11)준비된 자! 쓰임 받습니다. 준비된 자! 그의 나라를 차지합니다.
* 그런데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크나큰 은혜를 입은 입다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그의 실수는 경솔하고 그릇된 서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암몬 족속을 물리치기 위해 나아가는 입다에게 ‘여호와의 신’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삿11:29) 여호와의 신, 즉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입다에게 임한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했으니 입다에겐 더 이상 두려울 것도, 주저할 것도 없어야 했습니다. 승리는 이미 보장되었고 믿음으로 나아가 보장받은 승리를 거두어 오기만 하면 됩니다.
여호와의 신은 전지전능의 신이오, 모든 권세와 권능을 수여하시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아! 여호와의 신과 함께 적진을 향해 나아가는 입다여! 그대 이름은 승리! 그대 이름은 영광이라. 요한계시록 17장 14절에서 말씀합니다.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 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한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계17:14)
* 그런데 아뿔싸!(Yow) 한 일이 생긴 것입니다. 태어난 때로부터 늘 동행해 주셨고 이제는 역사의 무대 앞에 자신을 올려놓으시고 여호와의 신까지 부어 주셔서 승리의 사명자로 나아가게 된 그가 어느새 하나님을 망각하고 믿음과 신뢰를 저버린 조건부 서원을 한 것입니다. 서원은 조건을 놓고 하는 것이 아닌 순수한 충성과 헌신에서 비롯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본문 30-31절입니다.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언제 승리를 안겨줄 테니 너는 나에게 무엇을 주겠느냐? 물어오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언제 은혜주심, 사랑주심, 승리주심에 대한 보답을 요구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입다는 왜 이러한 어리석은 서원을 하게 된 것일까요?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일을 가증이 여기셨는데 말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는 네가 그와 같이 행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은 여호와의 꺼리시며 가증이 여기시는 일을 그 신들에게 행하여 심지어 그 자녀를 불살라 그 신들에게 드렸느니라.”(신12:31)
* 하나님은 우리가 조건을 걸 대상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타협의 대상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흥정의 대상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과 신뢰의 대상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조건 없이 충성하고 헌신하며 경배해야 할 신앙이십니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갈 우리가 무엇이라고 하나님께 조건을 걸고 흥정하겠습니까? 이런 교만함이라니........ “하나님! 승리를 주십시오. 제가 번제를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복을 주십시오. 제가 멋지게 헌신하겠습니다. 하나님! 이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아낌없이 충성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들으실까요?
하나님께서 과연 입다의 서원을 들으셨을까요? 그의 조건부적인 서원을 들으셔서...........사람을 번제물로 받으실 것을 생각하셔서 승리를 주셨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승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들이 내세우는 그 어떤 조건과 흥정에도 귀 기울이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스스로 하나님 자신의 일을 행하십니다. 승리 받을 만한 사람에게 승리를 주시고, 기쁨을 받을 만한 사람에게 기쁨을 베푸시고, 은혜를 누릴 만한 사람에게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 손에 붙이시매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크게 도륙하니 이에 암몬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삿11:32-33) 사람에 의한 사람의 승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우리 성도는 그 하나님의 승리 안에 있습니다. 온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성실과 오묘한 능력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십시오. 끝없는 죄악으로 소망 없던 우리에게 조건 없이 십자가를 세우시고 스스로 그 길로 오르신 예수그리스도를 깨달으십시오.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의 심령은 반듯이 뜨거워집니다. 그 뜨거움은 그 내면에 머무르지 않고 충성과 헌신을 향해서 끝없이 서원할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사람, 조건 없이 헌신하며 순결과 거룩으로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이제 우리는 성경 66권속에서 가장 큰 난제 중의 하나인 사건 앞에 마주 서게 됩니다. 그것은 입다의 경솔한 서원이 과연 이루어 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그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성도여러분! 과연 입다의 딸이 번제로 드려졌을까요? 역사적으로 입다의 딸에 대한 견해가 세 가지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첫째의 견해는 입다의 딸이 그 아버지의 서원대로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견해를 받아들일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인신제사를 엄히 금하신 것에 상반이 됩니다. 그리고 인신제사를 드린 그 사람은 돌로 쳐 죽임을 당하게 되었는데(레20:2-5)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로 계속 존재한 것과 상반이 됩니다. 둘째의 견해는 입다의 딸이 일평생 처녀로 성전에 드려져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했다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긍정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입다의 딸이 번제로 드려졌다면 입다가 위대한 믿음의 사람의 반열에 과연 오를 수 있었겠는가?
지혜롭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던 입다가 잘못된 서원을 대체 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율법을(레27:1-8)무시하고서 과연 그 딸을 잔인하게 번제로 드릴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일평생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그 딸을 드렸다는 견해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의 견해는 이스라엘의 율법은 원칙적으로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것을 금하였기 때문에 입다는 딸을 번제로 드릴 수가 없었다는 견해입니다. 그럼에도 입다는 서원을 지키기 위해 자기 딸을 번제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죽였다는 견해입니다. 만일 이 견해를 따른 다면 입다는 살인범이 됩니다. 그리고 이 견해는 성경의 기록이나 유대인의 전승과도 일치하지 않는 견해입니다. 저는 이 세 가지의 견해들을 놓고서 과연 어떤 것으로 실행되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타당하고 복음적으로 가까운 것은 두 번째 견해입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이 드는 것은 잘못된 서원은 혼돈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혼란스러울 뿐만 아니라 그 주위의 사람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님까지 당황스럽게 만들어 놓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한 사람의 서원은 그의 신앙입니다. 신앙은 조건과 흥정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끊임없는 순결한 서원으로 우리들의 신앙 불타오르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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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이란 이행을 전제로 한 하나님과의 약속을 의미합니다. 서원이란 히브리어로 이싸르 또는 네데르입니다. 이싸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 부정의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네데르는 서원하는 사람이 어떤 물질을 비롯하여 심지어 자신까지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약속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신앙은 고인 물처럼 머물러있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서원으로 확장됩니다. 서원의 이행은 더 깊은 신앙으로 그를 견고케 합니다. 신앙이 깊으면 깊을수록 전능자를 향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충성의 정도가 깊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약속합니다. “저의 삶 전부를 드리겠습니다. 저의 첫 아들을 주님의 종으로 드리겠습니다. 저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오직 주님만 섬기겠습니다. 저의 모든 재산을 주님을 위해서만 사용하겠습니다. 저는 주님의 복음을 들고 오지일지라도 달려가겠습니다. 주님께 이 생명도 드립니다.” 모두다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의 발로(發露)입니다.
서원의 최고봉은 목숨까지도 드리는 것입니다. 순교자의 피 흘림은 어쩌다 보니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겠습니다.” 하는 서원에 바탕을 둔 절대 신앙의 결과가 순교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께 대한 확신과 사랑이며 하나님께 대한 확신과 사랑은 서원으로 드려집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헌신의 약속들이 마음으로부터, 혹은 입술로 계속 드려지고 있다면 그의 신앙은 지금도 불타고 있는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헌신의 약속이 중단되었다면 그 신앙은 점검의 대상이 됩니다. 오늘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서원은 어떻습니까?
그 어떤 것에도 타협하지 않으며 목숨까지도 이미 하나님께 맡긴 순수 신앙, 절대 신앙 맞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조건을 걸 대상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타협의 대상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흥정의 대상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과 신뢰의 대상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조건 없이 충성하고 헌신하며 경배해야 할 신앙이십니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갈 우리가 무엇이라고 하나님께 조건을 걸고 흥정하겠습니까? 이런 교만함이라니........ “하나님! 승리를 주십시오. 제가 번제를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복을 주십시오. 제가 멋지게 헌신하겠습니다. 하나님! 이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아낌없이 충성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들으실까요? 우리들이 내세우는 그 어떤 조건과 흥정에도 귀 기울이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스스로 하나님 자신의 일을 행하십니다. 승리 받을 만한 사람에게 승리를 주시고, 기쁨을 받을 만한 사람에게 기쁨을 베푸시고, 은혜를 누릴 만한 사람에게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