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수께끼라는 말은 ‘우회하다. 회피하다.’ 라는 아랍어에서 유래 되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오묘한 말(잠1:6) 은밀한 말(민12:8)’로 번역되어 쓰이고 있습니다. ‘감추어져서 알 수 없는 일, 드러나지 않은 은밀한 일’이 수수께끼의 본래적 의미입니다. 오늘은 이 수수께끼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의 수수께끼는 이렇습니다. 마노아의 아들 삼손의 출생과정은 아주 특별했습니다. 그의 출생이 특별했던 이유는 단지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자녀를 잉태할 것이라는 수태고지에만 있지 않습니다. 삼손의 잉태에 대한 하나님의 사자의 현현이 특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생명의 잉태 자체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요 비밀스러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이 사람에 의해서 사람을 통하여 잉태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손길을 통하여 생명이 잉태됩니다.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17:25)
* 그렇다면 삼손의 출생이 왜 특별한가? 그것은 삼손이 나실인, 즉 하나님께 구별되어 쓰임 받는 사명자이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13장 5절에서 말씀합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니라” 나실인의 의미는 ‘성별된 자, 바쳐진’ 자라는 뜻입니다. 많은 무리 가운데서 들림 받은 사람, 그리고 세상에 속하여 세상의 삶을 살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려진 삶이 나실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오늘 성도의 자리에 세움을 받은 우리는 과연 어떠한 사람들일까요? 제가 드리고자 했던
첫 번째의 수수께끼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삼손처럼 특별한 사람일까요? 아니면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 평범한 사람일까요? 도대체 오늘 나는 누구입니까? 디모데 후서 1장 9절에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성도의 자리에 세움을 입은 우리 모두는 거룩한 부르심, 즉 영원 전에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별된 부름을 받은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영적인 나실인이 오늘의 성도입니다.
* 여기에 대해서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 할 것입니다. “온 세상에 성도가 얼마나 많은데 .........한국만 해도 약 천 만 명이나 되잖아! 그렇다면 그 모든 사람들이 다 특별하다는 이야기인가? 그 많은 성도중의 한 사람이 뭐가 특별해?” 성도가 특별한 존재됨의 이유는 다름 아닌 전능자이신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불러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특별함의 이유는 내게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 말씀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뚜렷하게 자각(self-consciousness)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존재는 하늘의 천사도 흠모할 만한 특별한 존재요, 그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는 영광의 복,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 이제 오늘의 두 번째 수수께끼입니다. 삼손은 자신들의 백성에게 큰 환난거리요, 고난이었던 블레셋 백성 중에서 아내를 취하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마노아 부부는 “어찌 이스라엘 백성 중에 여자가 없어서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서 아내를 취하려 하느냐”(삿14:3) 하며 반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손은 자신의 뜻을 꺾지 않고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삼손이 어떤 사람입니까? 잉태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나실인으로 태어난 특별한 사람 아닙니까?
그렇다면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나실인에 합당한 생활 성품과 거룩한 인격을 배우며 자랐을 것입니다. ‘얘야! 너는 구별된 사람이야! 그러기에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너는 하나님께 드려진 나실인이야 그러니 거룩히 살아야 한다. 세상과 섞이면 안 된다.’ 그런데 그 누구보다도 거룩하고,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종다운 삶을 살았어야할 삼손이 어찌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의 여인과 결혼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은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도가 세상과 섞이는 것 말입니다.
*오늘 본문 4절입니다. “이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할한 고로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함이었으나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 로서 나온 것인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오늘 제가 드리고자 하는 두 번째 수수께끼 핵심이 이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만일 기록된 말씀을 그대로 받는다면 삼손이 나실인의 규례를 어기고 블레셋 여자와 결혼하는 것, 그리고 블레셋 여자와 결혼 하도록 하여 블레셋을 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뜻이 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데 나실인을 실수와 허물에 자리로 내몰며 당신이 세우신 율법과 규례를 허무는 작전을 세우신다는 말입니까?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수수께끼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 블레셋의 40년 압제를 이스라엘 가운데서 제거하시고 자유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분명 했습니다. 그래서 삼손을 나실인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나실인이었지만 육체를 입은 사람이었기에 완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여자를 선택하는 실수와 허물을 범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와 허물 때문에 한번 세우신 당신의 뜻을 꺾으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부족하고 모자라지만, 허물과 실수가 많지만 오히려 그것들을 계기로 거룩하신 뜻을 성취해 내시는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서6장 17절에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모인 우리 한 사람 한사람에게 그에 합당한 뜻과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뜻과 계획을 반듯이 이루어 가십니다. 과연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약함 때문에 절망하지 말고 허물과 실수마저도 선으로 바꾸시며 여러분을 놀랍게 성취시켜 가시는 하나님께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 이제 오늘의 마지막 수수께끼입니다. 삼손이 블레셋의 아내를 얻기 위하여 딤나(Timnah) 라는 지역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한 포도원에 이르게 되었는데 갑자기 한 젊은 사자(A young lion)가 삼손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면서 으르렁 거리며 덤벼듭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무서워서 어쩔 줄 몰라 하던지 아니면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도망을 쳤을 텐데 삼손은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염소 새끼를 찢음같이 맨손으로 그 젊은 사자를 순식간에 찢어 버린 것입니다. 과연 그 용맹함과 그 놀라운 힘은 어디로부터 나온 것일까?
본문 6절에서 말씀합니다.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그렇습니다. 삼손이 삼손 됨의 힘과 능력은 그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우리 됨은 어디로부터 나올까요?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게 차고 넘치면 넘지 못할 산도 넘고, 무너뜨리지 못할 대적도 무너뜨립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에서 올꼬? 나의 힘이 어디에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 백수의 왕인 사자를 죽인 삼손은 얼마 만에 그 마음에 기쁘게 여기던 이방여인에게로 다시 내려갑니다. 내려가는 길에 보니 자신이 찢어놓은 주검이 된 사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자의 몸에 수많은 벌떼와 꿀이 가득 고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죽은 사자의 몸에 벌떼가 이렇게 가득 모여 들었을까? 어떻게 죽은 사자의 몸에 집을 짓고 꿀을 잔뜩 쏟아 냈을까?’ 삼손은 그 꿀을 먹으면서 신기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 사건을 뒤로 하고 삼손은 블레셋의 풍습을 따라 신부의 집에서 칠일동안 혼인잔치를 벌입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신부와 신랑을 위한 들러리로 불러온 30명의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삼손을 경계하기 위한 정탐꾼이었습니다. 삼손은 고대사회의 특별한 행사나 잔치 때의 풍습을 따라 거기 모인 들러리에게 수수께끼를 던집니다.
본문 14절입니다.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강한 것이 나왔느니라.”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기간은 잔치가 마무리 되는 칠일 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걸린 내기는 베옷 30벌과 겉옷 30벌 이었습니다. 과연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이 수수께끼를 풀어 낼 수 있을까요?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온다.”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
* 블레셋 사람들은 전전긍긍합니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록 풀리지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수수께끼는 삼손에게만 경험되어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마음은 요동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못 맞출 경우는 자신들이 베옷 30벌과 겉옷 30벌을 주어야 했을 뿐 아니라 자존심에 상당한 타격을 입기 때문이었습니다. 삼손은 자신들의 노략거리요 밥이었던 이스라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 된 여자를 위협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려 합니다.
본문 15절입니다. “제 칠일에 이르러 그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이르되 너는 네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리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사르리라” 결국 삼손은 협박을 받고서 거짓 눈물로 호소하는 아내의 숨겨진 의도를 알아채지 못하고 수수께끼를 풀어 줍니다. 그리고 절대로 발설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분명히 했을 그의 아내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그 답을 알려 줍니다.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삿14:18) 아뿔사! 삼손은 그제야 자신의 수수께끼가 공정하지 않은 비열한 방법에 의해 풀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18절) 이일로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의 비겁함과 교활함 그리고 도저히 함께 하지 못할 할례 받지 못한 심판의 대상임을 역력히 깨달았습니다.
* 이제 제가 드리고자 하는 수수께끼는 이것입니다. 과연 공정하지 못한 삶의 결과, 비열한 세상의 방법을 통해 얻은 형통의 결과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에게 협박을 가하는 공정하지 못한 방법, 비겁하고 교활한 수작까지 동원하여 수수께끼를 풀어서 ‘좋아라.’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겼어. 삼손 제깟 놈이 우리를 당해 낼 수 있겠어?” 그러나 그들의 기쁨은 곧 눈물이 되었고 그들의 승리는 곧 죽음이 되었습니다.
*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에게 세상살이는 늘 수수께끼 같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게 된 것도, 오늘 하루하루를 사는 과정도, 그리고 내일의 문제까지 모두 수수께끼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줄알고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여 얻으려하고 쌓으려하고 높아지려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처럼 목적한 것을 손에 쥐는 것이 문제지 그 과정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공정해야 할 일에 편법을 씁니다. 정직해야할 일에 거짓 합니다. 진실해야할 때에 교활합니다. 사랑해야함에도 미워하고 칭찬해야할 때 오히려 깎아내립니다. 정답을 그릇되었다고 우깁니다. 그러나 우리 택함 받은 성도는 이것을 밝히 알아야 합니다. 세상과 온 우주의 모든 것이 수수께끼 같지만 그 모든 것에 대한 완전무결한 답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40장 8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나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모든 해석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로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오직 성령의 사람이 되십시오. 이것이 앞을 전혀 예상 할 수없는 수수께끼 같은 세상에서 모든 것들을 물리치고 승리하여 영광 얻는 유일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