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을 헬라어로 ‘안드로포스’라 합니다. ‘안드로포스’라는 뜻은 ‘위를 바라보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위를 바라보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바라봄 방향은 어디입니까? 세상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정말 하나님 맞습니까?
* 이스라엘백성을 애굽에서 이끌고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시내산으로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사십일(출24:18)간 택함 받은 백성의 삶과 생활과 신앙에 대한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 사이에선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눈에 늘 보이며 하나님의 신적인 권능을 행하던 모세가 무려 사십 일 간 보이지 않아 불안했기 때문입니다. 보여야할 존재가 보이지 않고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해야할 존재가 확인되지 않자 그들은 모세 대신 보이는 또 다른 존재를 만들자고 난리를 칩니다. 출애굽기 32장 1절입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되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낸 사람은 어찌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 그리하여 결국 만들어 낸 것이 자신들의 금귀고리를 모아서 만든 송아지 형상의 조각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자신들의 금으로, 자신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숨도 쉬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그 송아지 형상의 조각물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신이라고 하며 숭배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그런데 이러한 유대인들의 지극히 어리석은 행위가 바로 우리 인간들의 자화상이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사랑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힘으로 여겨 자신의 손에 얻고자 하는 마음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러분! 우리 사람들은 뭔가 눈에 보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니 눈에 보이는 그 어떤 힘 될 만한 것이 없으면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힘이 될 만한 것들을 모으려고 그렇게도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돈은 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모으려합니다. 권력도 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오르려 합니다. 명예도 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얻으려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명백백히 알아야할 진리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힘이라 여겨지는 것들은 다 깨어지기 쉽고 상하기 쉽습니다. 손에 쥔 것 같다가도 쉬 사라지고 말 것 들이 눈에 보이는 힘입니다. 과연 우리가 진정으로 보아야할 것들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의 ‘바라봄의 방향/Direction of sight’ 은 어디입니까?
* 지난 5월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약 40세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찬양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다가가서 제 소개를 하고 복음을 전하니까 “나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위로를 했습니다. 계속 눈물을 흘리기에 “어떤 어려움이 있으세요?” 라고 물으니 “당신의 찬양을 들으니 하나님께 감사해서요.” 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던 그들의 가정에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늘 의지하며 사랑했던 그녀의 남편이 14년 전에 누구인지도 모른 채 그리고 이유도 모른 채 살해를 당했고 그냥 그렇게 자신과 아이들에게서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거친 광야 같았겠습니까?
그 마음, 그 상황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망망대해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자신과 아이들에게 하나님은 찾아 오셨고 그 하나님으로 인하여 소망을 얻고 힘을 얻어 고난과 환난을 이기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노라고............ 의문에 쌓였던 그 사건은 십자가 뒤로 던져 버리고 보이지는 않지만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여기까지 왔노라고......... 하나님이 최고의 힘이라고 고백 한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의문의 산을 넘고, 고난의 강을 건너며, 환난의 벽을 뛰어 넘는 힘은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쥔 세상의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 우리가 진실로 보아야할 것을 보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세상 것에 통치를 받게 됩니다. 세상이 우리의 심령을 통치하면 우리는 박수 받고 칭찬 듣는 일을 위해서 그 삶을 정신없이 투자하게 됩니다. 헛된 일에 분주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의 것이 우리의 눈을 다스리면 많이 모으고 적게 쓰는 일에 골똘합니다. 인색하며 무정해 지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눈이 현실에 지배당하면 높아져서 왕처럼 군림하는 일을 위해 그 목숨을 겁니다. 목이 곧고 교만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박수 받고 칭찬을 듣는 일을 거부하고 의와 진리를 위해서 욕을 당하고 눈물을 흘리는 일도 기꺼이 감당합니다. 천국을 차지하는 삶입니다. 또한 우리의 눈이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으면 비록 적게 모을지라도 하나님께 영광 되는 일을 위해서라면 많은 것을 사용하는 일에 그 삶을 헌신합니다. 가난한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영광의 나라를 다스릴 삶입니다. 진정 우리의 눈이 하늘을 향하여 있다면 가장 낮은 자리에 있을 지라도 왕 같은 기쁨을 누릴 일을 위해 그 삶을 헌신해 갑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온 삶을 다해 묵묵히 헌신하는 분들입니다. 진정한 행복의 가치를 아는 삶입니다.
* 우리가 잘 아는 모세는 바로 왕의 공주의 양자로 자랐습니다. 그가 계속해서 공주의 아들로만 있으면 그의 삶에는 왕에 버금가는 부귀영화가 가득 주어지게 됩니다. 누구나 부러워하고 누구나 선망하는 영광이 그냥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가슴에 감추어두고 왕자로써만 살아가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음식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옷이, 세상에서 가장 탐스러운 보화가 자신의 차지가 됩니다. 그러나 모세는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이 되는 것을 믿음으로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하나님의 편에, 유대인의 편에 서서 그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히11:26-27) 그렇습니다. 보이는 힘과 세상에 사로잡힌 삶이 아닌 보이지는 않지만 언제나 살아계셔서 역사하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면 그 어떤 것도 부럽지 않고,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은 하늘에 속한 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자의 삶은 부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삶이 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최고이시기 때문입니다.
* 우리의 안목이 현실에 통치를 받으면 즉, 현실이 우리의 안목을 다스리면 진수성찬을 먹고 마시는 일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길 것입니다. 또한 화려한 옷과 값비싼 의류를 입고 “날 좀 봐주세요.” 하며 세상에서 들려오는 반응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것 어디에서 샀어요. 정말 고급스럽네요.” 우리 인간의 속성은 능력이 없어서 그렇지 여건만 되면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는 것, 세상에서 가장 좋다는 것, 세상에서 가장 높다는 것으로 그 기쁨과 즐거움과 권세를 누리려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죄악의 본성을 입고 있는 우리 육체의 자기정체입니다.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에 집중하게 하는 것 말입니다. 또한 우리의 눈과 심령이 현실의 지배를 당하면 낙심하고 절망하며 패배의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세상의 현실은 우리를 자주 넘어뜨리고 다치고 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넌 이제 끝장이야. 너에겐 미래가 없어. 넌 실패자야. 그 능력으로? 네 현실을 봐.” 사단의 지칠 줄 모르는 공격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보이는 현실이 아닌 보이지 않는 세계, 곧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실패할지라도 여전히 승리를 소망하며, 넘어졌을지라도 또 일어서며, 가난할지라도 전혀 비굴하지 않습니다. 또한 병들었을지라도 그 병에 메이지 아니하고 감옥에 갇혔을지라도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와 소망과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 꿈꾸는 사람 요셉, 그는 자기가 상상하던 삶과는 달리 노예로 팔리고 조금 형통하는가 싶더니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오히려 성폭력범으로 누명을 쓰고 깊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꿈은 완전히 소멸되어 버린 것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형제들의 곡식의 단이 자신의 곡식의 단에 절을 하고,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절을 하던 그 영광의 꿈은 어찌된 것일까요? 절망하고 좌절하고 낙심하며 포기해야할 상황이 그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가 처한 현실 앞에 전혀 무릎 끓거나 통치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마주한 현실은 성난 파도처럼 혹은 굶주린 사자처럼 자신을 지배하려 들었지만 요셉은 여전히 하나님을 보았고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꿈대로 이루어지는 삶, 아니 자신이 상상했던 꿈보다 훨씬 더 큰 복을 얻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41장38-40에서 말씀합니다.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 내 눈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께서 날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순간이나 찰나도 놓치지 않고 내 행위, 내 형편, 내 처지, 내 눈물, 내 아픔, 내 억울함, 내 소원 등 나의 모든 삶을 나 자신보다 더 깊고, 자세하고, 분명하게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나는 해결 할 수 없지만 그 분은 해결해 주시고, 나는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라 방황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갈 길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아시고 선한목자가 되셔서 그 길로 인도해 가십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길이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길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길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길로 인도해 가십니다.
* 우리의 몸은 병들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실패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불편하고 부당한 일에 묶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깊은 감옥에 갇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적 분명한 진리는 우리의 영혼은 그 어떤 상황, 그 어떤 현실 앞에서도 자유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이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바라보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분의 통치 아래 있으면 우리는 언제나 자유자요, 언제나 힘 있는 영혼으로 세상의 모든 담을 뛰어 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실패도 그를 묶어둘 수 없고, 질병도 그를 넘어뜨리지 못하고, 감옥도 그를 절망하게 못하며, 죽음도 그를 이길 수 없습니다.
* 현실을 보는 것은 얻는 것 같으나 잃는 삶입니다. 땅을 바라보며 사는 삶은 사는 것 같으나 죽는 삶입니다. 그러나 현실이 아닌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보며 사는 삶은 잃는 것 같으나 얻는 삶입니다. 땅이 아닌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삶은 죽는 것 같으나 사는 삶일 뿐 아니라 영원히 사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지매여러분! 현실의 벽을 언제나 뛰어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이 땅에서도 승리자가 되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고 싶지 않습니까? 저는 너무도 그러고 싶습니다. 이 땅에서 진정한 승리자가 되며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고 싶은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십자가 위로 오르신 예수그리스도를 봅니다. 이제 여러분의 바라봄의 방향은 어디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