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전 정부가 국민들의 많은 저항에도 불구하고 4대강 사업을 추진하면서 반드시 추진해야하는 당위성 그 배경에 대해서 이렇게 제시했습니다. 첫째, 기후변화에 따른 가뭄, 홍수의 근원적 대책 둘째, 오염원 집중 관리 등으로 수질개선과 생태계복원 셋째, 수상레저, 문화 활동 공간 및 프로그램제공 넷째, 물 공간의 정비로 국토디자인 품격 항상. 그러면서 한강에 3개, 낙동강에 8개, 금강에 3개, 영산강의 2개 등 댐에 준하는 16개의 보를 건설했습니다. 정부에서는 22조 2천억 원의 비용이 들었다고 했지만 여러 전문가의 견해에 따르면 적어도 30조 이상의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공사가 강행되었습니다.
4대강 공사는 이명박 정부 임기 내에 마치기 위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혹한의 겨울도 가리지 않는 무리한 공사가 계속되었습니다. 정부가 원하던 대로 다행히 임기 내에 4대강 공사를 마친 정부는 모든 언론을 통해서 홍보하고 또 홍보했습니다. 홍보한 내용대로라면 4대강공사는 흠잡을 것 없는 국가 최고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홍보와는 달리 오늘의 4대강 공사의 현 주소는 그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만든 보를 폭파해서 원래대로 복원해야한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너무나 참담한 이야기 아닙니까?
* 자연의 미, 생태계가 완전히 망가진 것은 둘째하고 적어도 식수의 문제는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4대강 공사를 한 대부분의 지역에 녹조가 심하게 발생하여 식수가 걱정될 지경입니다. 그 외에도 자연을 역행함으로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점들이 속속 들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대통령의 자리는 국민이 나라와 백성을 섬기라고 불러준 자리입니다. 그는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국민의 부름을 받은 대통령과 그 위정자들은 오직 국민을 위하고, 오직 민족을 위해서 사심 없이 충성하고 열심 내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이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고서 국민위에 군림하고, 국민을 억압한다면 그들은 부름의 뜻을 잊어버린 실패한 정부가 되고 그 피해는 국민이 받게 됩니다.
저는 오늘 현재 4대강에서 발생되고 있는 문제들을 보면서 이러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과연 이명박 정부는 국민들의 부름에 제대로 응답했는가? 과연 이명박 정부는 올바른 일에 진정열심 내었는가? 그리고 과연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 가운데 있는 우리 성도는 제대로 응답하며 살고 있는가? 과연 우리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혹한과 폭염에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수고하는 이 열심의 열매는 무엇일까?” 하고 말입니다.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의 복된 미래를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늘 깨어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왜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셨을까?”
* 오늘 본문은 유대교의 남다른 신봉자였던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전부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죽이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사도가 된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바리새인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행23:3,6) 또한 그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행16:37) 그리고 유대 베냐민 지파사람이었습니다. 엄격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빌3:5,6) 그리고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행22:3) 이러한 사울의 생애는 특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특권에 따른 각종 권세와 특혜가 주어져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웬일인지 이러한 자신의 배경과 경험, 지식과 학문을 바탕으로 그 누구보다 열정을 다하고 열심을 내어서 하나님의 약속인 메시아이신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습니다. 당시의 종교주의자들이었던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움의 탄식이, 참으로 아쉬움의 절규가 흐르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울은 어찌하여 그 좋은 가문, 그 귀한 당대 최고의 학문과 지식, 그 탐낼만한 특권으로 그 시대와 영혼들을 뒤덮고 있는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을 믿는 오류를 보지 못했을까? 사울은 어찌해서 당시 누구나 가지지 못했던 그 지식과 학문으로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주마 약속하신 그리스도로 깨닫지 못했을까?
*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 어떤 막강한 배경과 경험, 그 어떤 놀라운 지식과 학문을 소유한 사람일지라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발견하지 못하고, 주님을 통하여 성취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그의 배경과 경험, 그의 지식과 학문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이 됩니다. 그가 얻은 배경과 경험, 그가 쌓은 지식과 학문, 그가 쥐고 있는 권력과 물질이 오히려 그 자신을 삼켜버려 짐승처럼 살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짐승처럼 산자의 갈 곳은 어디입니까? 영원한 형벌과 죽음입니다. 본문1절을 주의 깊게 읽어보십시오.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장에게 가서” 당대 최고의 학문의 전당인 가말리엘문하에서 배운 사람의 실상이 여기 있습니다.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 그렇습니다. 하나님 밖에서 사는 사람들의 실상이란 가난한 자나 삼성에 버금가는 부자나, 낮은 자나 왕에 버금가는 높은 자나, 못 배운 자나 하버드이상의 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여러 개 가지고 있는 자나 동일합니다. 모두 육체의 일들을 위해서 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21)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불로 제련해야 합니다. 내가 오늘 하나님의 불로 제련되면 세상일을 위해 쓰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것으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지식도 하나님을 위하여, 명예도 하나님을 위하여, 권세도, 물질도, 성품도 모두 다 하나님을 위하여 쓰여 집니다. 하나님의 불로 제련!!! 보배입니다.
* 온 마음에 위협과 살기를 가득 품고서 끝 모르는 저주와 죽음을 위 해 다메섹을 향해 달리던 사울에게 예수그리스도의 부르심이 임하였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은혜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 그리스도의 이 엄위한 부르심은 사울의 빗나간 열정에 대한 심판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그 길이 아니야! 지금 네가 그토록 열심 내는 것은 헛된 일이란다.” 더불어 그리스도의 이 엄위한 부르심은 한 사람의 죽음을 위한 열심을 생명을 위한 열심으로 바꾸어 주시려는 회복과 은혜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지금 네가 걷고 있는 그 길은 진리의 길이 아니라 사망의 길이란다. 이제 그 오류에서 돌아서야 한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쫓으라.” 참 사명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은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축복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부르신 그리스도께서 오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오류에서 진리로 돌아서라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돌아서라고, 땅의 것에서 하늘의 것으로 돌아서라고 부르십니다. 여러분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까?
* 해의 사명은 빛을 비춤에 있습니다. 또한 달의 사명과 별의 사명도 빛을 비춤에 있습니다. 빛을 드러내지 않는 그들의 존재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흙의 사명은 자기에게 심겨진 것들에 대해 모든 것을 다 내어줌에 있습니다. 만일 흙이 자기를 아끼면 자기에게 심겨진 것들에서 그 어떤 열매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의 사명은 무엇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그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나님을 영광되게 함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 목숨 걸고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오늘까지 살아온 우리들의 삶을 곰곰이 돌아봅시다. 과연 하나님을 위하여 어떤 열심으로 어떻게 살아 드렸는지 말입니다. 나 자신을 위하여 열심 내던 삶은 오늘까지의 시간으로 도충분합니다. 30년 40년 50년, 내 맘대로 살았는데 아직도 불충분합니까? 먹고 입고 마심을 위하여 살던 삶도 지금까지의 시간으로도 충분합니다. 무엇을 더 먹고 입고 마시겠습니까? 또한 주님께 그토록 게으르고 나태하고 소극적이던 삶도 지금까지의 삶으로도 충분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 지난 금요일 거리의 예배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주셨는지요. ‘이렇게 예배하다가 부름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예배하다가 부름 받으면 얼마나 큰 축복일까?’ 할 만큼 얼마나 예배로 집중하게 하시는지. 얼마나 예배로 은혜 되게 하시는지 말입니다. 또한 그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전심으로 할렐루야를 외치고 아멘으로 화답하는지 말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여러분! 이제는 오직 하나님만을 위한 일에 열심 내야 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젠 돌아서야지? 이젠 나를 위해 힘써야지 않겠어? 이젠 하늘을 차지하기 위해서 열심 내어야지. 시간이 많이 지났잖아”
*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따라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되면 우리의 눈은 반드시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을 향하여 그토록 부요하고 그토록 욕심 많게 살았던 사람들이 참혹할 만큼 가난해지고 초라해진 모습을 말입니다. 또한 주님의 나라에서 우리들의 눈은 이 세상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끝 모르게 교만했던 사람들이 완전히 시들어버린 꽃잎처럼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나라에서 우리의 눈은 이 세상에서 그토록 담대하고 용감한 모습을 하고 살았던 사람들이 극한 절망에 빠져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역전의 나라입니다. 이 땅에서의 낮음이 낮음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높음으로 뒤 바뀌는 나라! 이 땅에서의 가난함은 가난함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더 이상 채울 필요가 없는 부요함으로 바뀌는 나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부름 받은 자의 삶! 맞습니까?
*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딤후1:9) 우리 성도들이 해와 달과 별을 합친 것보다도 빛난 충성을 해야 하는 이유는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 빛난 충성을 해야 하는 이유는 이미 가장 크고 놀라운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부르신 부름에(빌3:14) 응답하며 사는 우리 성도들이 세상의 모든 꽃들을 모아 만든 향수보다도 더 진한 향기 나는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평화를 누리며 기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의 그 어떤 피조물보다 향기 나는 헌신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없는 평화와 기쁨을 이미 받았기 때문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우리들의 인생길이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면 어떨까? 과연 오늘 나에게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은혜가 없었다면 어떨까? 그 무엇을 하든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고 있음은 너무도 자명한 일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그리스도의 엄위하신 부름을 받고 사도된 바울이 이렇게 증언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해야 합니다. 위에서 부르신 부름에 정결하게 아멘 해야 합니다.
* 미국샌디에고 연합감리교회에 지난달 23일 담임목사로 부임한 윌리 라일 목사님을 근거로 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레미야 스티펙’이라는 목사님이 자신이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는 교회 근처에서 주일 오전에 노숙자로 변신하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만 명 정도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교인 중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온 사람은 불과 서너 명에 불과했습니다. 스티펙 목사는 교회로 향하는 교인들에게 '음식을 사려고 하니 잔돈 좀 달라'고 했지만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 마음이 몹시도 힘들었습니다. 예배 시간이 되어 교회에 들어간 스티펙 목사는 맨 앞자리에 앉았지만 예배 위원들의 저지를 받고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맨 뒷자리에 겨우 착석하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새로운 목사가 부임했다는 광고시간이 되었습니다. 맨 뒷자리에 앉아있던 스티펙 목사는 노숙인 차림 그대로 강단에 올라갔고 교인들은 경악스러워했습니다. 그는 곧장 마태복음 25장 31절부터 40절까지를 읽어 내려갔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스티펙 목사가 말씀을 마치자 회중은 무언가에 심하게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인들 중엔 흐느껴 울면서 회개하는 사람이 속출했고 부끄러움에 고개를 떨구는 교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스티펙 목사는 이날 오전 자신이 겪었던 것을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늘 아침 교인들이 모이는 것을 봤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세상에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제자는 부족합니다. 여러분들은 언제 예수의 제자가 될 것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왜 우리를 부르셨을까요?
*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 성도들의 가치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합친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 보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 보배’를 입은 증거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신 사건, 하나님께서 친히 저주의 나무에 자신을 못 박으신 사건이 바로 우리 성도들의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천사도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성도는 천사들이 흠모할 존재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요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절대보배를 입은 우리가 여전히 아침이슬처럼 사라지는 이 땅의 일을 위해 열심을 내어야 하는가 말입니다. 여전히 자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살아야 하는가 말입니다.
성도는 육체의 일에 열심 내는 사람이 아닌 육체로 영의 일에 열심 내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땅의 일에 열심 내는 사람이 아닌 바로 이 땅에서 영원한 일을 위해 열심 내는 제자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불러주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엄위하신 부르심에 곧 일어서서 삶으로 아멘하실 수 있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