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과 같은 질문을 시작으로 오늘의 말씀을 증언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하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금 네가 그렇게 정성들여 가꾼 집! 나의 영광을 위하여 내어 줄 수 있겠느냐?” 어떻습니까? 여러분! 이에 대해 과연 아멘 할 수 있을까요? 좀 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으나 이 삼억의 집보다 더 귀한 보물이 있다면 내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 더 큰 것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주 특별한 믿음의 사람들은 그 집이 유일의 전 재산일지라도 드리게 됩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의 기초는 바로 그러한 분들의 신앙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한국교회 120년의 시간동안 얼마나 많은 순결한 성도들이 헌신했겠습니까? / 그렇다면 이러한 요구는 어떨까요? “너의 생명! 나에게 번제로 드릴 수 있겠어? 너의 유일한 자녀! 나에게 제물로 바칠 수 있겠어?” 과연 내 생명, 내 자녀까지 드릴 수 있을까요? 이러한 요구에 대해 “이것만은 안 됩니다. 글쎄요.” 라는 대답보다는 “하나님!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도대체 납득이 안 됩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죠. 자녀를 번제로 드리라니요?” 라고 항거할 것입니다.
* 보석 꾸러미로는 헌신을 할 수 있어도, 재산으로는 충성을 할 수는 있어도, 목숨까지 내어 바치는 경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일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녀의 생명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불에 태워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믿음이란 더 값진 것을 신뢰하고 덜 값진 것을 내어 드리는 일이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가장 값진 것, 가장 소중한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하실 때에도 드릴 수 있는 마음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마가복음 12장 30절에서 증언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이란 일부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계산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까지 라도 드리는 것입니다.
* 하나님과 전혀 관련 없이 살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1-2) 참으로 놀랍고 보배로운 하늘의 은혜를 아브라함이 입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인 인간을 찾아오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말씀 앞에서 고민에 고민을 하였을 것입니다. “도대체 누굴까? 분명 사람과는 다른 어떤 존재였는데....... 그 힘 있는 위엄은 처음 경험하는 것인데.........” 결국 아브라함은 고민의 끝자락에서 자신을 찾아오신 전능자를 향한 믿음을 붙잡았습니다. 전능자를 향한 믿음을 붙잡았다는 것은 세상의 아버지와 함께 육체를 위해 살던 삶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의 삶으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 이러한 믿음의 길을 걷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언약하신대로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 자신도, 그 아내 사라도 이미 나이 들어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처지였는데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그 아들의 이름은 이삭입니다. 언약의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백세에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오랜 세월 기다려서 얻은 아들이요, 바랄 수없는 중에 기적으로 얻은 아들이었으니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습니까? 보석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재산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생명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적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아브라함은 청천 벽력같은 이 명령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을 것입니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분명 하나님의 음성 맞는가?” 거부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 음성, 그 명령은 조금도 의심할 바 없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음을 알고 마음이 녹아 내렸을 것입니다. “아! 어찌 이 절대사랑을 포기하라는 말인가?”
*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드렸던 질문을 다시 한 번 꺼내보겠습니다. 만일 오늘 우리에게 아브라함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진다면 어찌할까요? “네 아들을 번제로 드려라” 감당 할 수 있겠습니까?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대분 분의 사람들은 “하나님! 다른 건 다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거두어 주십시오.” 라고 타협하거나 “하나님이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이럴 것을 뭣 때문에 자녀로 주셨습니까?” 라고 항거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이러한 생각과는 달리 아브라함은 단 한마디의 불평이나 항거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실행합니다. 그것도 명령이 떨어진 날, 이른 아침에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산을 향해 나아갑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삼일 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백세 때에 얻은 그 사랑의 아들,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아들을 번제 단에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칼을 들어 아들을 잡으려 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그 명령을 기다렸다는 듯이 서슴없이 칼을 휘둘러 아들을 죽여서 재물로 바치려는 것입니다. 막힘이 없는 행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신앙을 '침묵의 신앙'이라고 불렀습니다. 두말없이 초연히 자신을 넘고 혈연을 넘어 하나님께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여러분! 도대체 아브라함은 누구입니까? 그는 과연 아들을 사랑한 것일까요? 어찌 아비가 제 아들을 서슴없이 죽여 제물로 드린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렇게 행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진정한 믿음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뜻에 생명을 담보하고 순종을 지나 복종하는 삶입니다. 아! 보배로운 믿음이여! 아브라함의 믿음이여!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할 믿음입니다. 생명까지 드리는 신앙!
*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우리 성도들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출3:14) 하나님은 모든 것에 능하신 전지전능이시며(창28:3) 모든 곳에 계시는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시139) 하나님은 영생하시는 분이시며((창21:33) 측량할 수없는 분이십니다.(롬11:33) 이러한 하나님의 완전한 일하심의 증거는 우주 삼라만상에서 지금도 제 역할을 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서 드러납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서, 하늘과 하늘위의 하늘에서 그리고 땅과 바다와 물과 공기 속에서, 또한 사계절의 오묘한 순환 속에서, 우주의 질서정연한 움직임 속에서.........드러납니다. 더 이상 열거할 필요가 없습니다. 친히 창조하시고, 친히 운행하시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친히 하나님 자신의 뜻을 성취시켜 가십니다. 바로 그 분이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께 생명을 드리는 것입니다.
* 또한 성도로 세움을 입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죄악으로 인해 영원한 죽음과 형벌을 향해 달음박질하는 우리를 위해 친히 사람이 되신 분이십니다.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사람이 되셨을까? 온갖 더러움과 무식함과 추함과 미움과 시기와 탐욕과 살인이 난무하는 이 땅이 뭐가 좋아서 오셨을까? 그 어떤 사람의 이성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만의 방식입니다. 게다가 그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가치와는 전혀 다른 - 그래서 베드로도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깨닫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했고 사도 바울은 나는 죄인중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친히 저주의 나무에 달아 죽이셨습니다. “아! 그 하나님은 왜 그러셨을까? 이 벌레 같은 내가 그 십자가에 달렸어야 했는데.......... ”
*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친히 목숨까지 내어 주시고 우리에게 영원히 사는 길을 열어 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이러한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신앙이 있다면 그 삶은 어떤 바위보다도 견고할 것입니다. 목숨까지 내어 주신 분이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바르고 분명하게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을 바르게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에게 생명까지 내어주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없는 것은 아직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발견하는 넓이만큼, 하나님을 깨닫는 깊이만큼 그의 믿음은 아브라함처럼 분명하고 정결하게 됩니다.
*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사람들조차도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돈을 더 신뢰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하면서 과연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있는 힘이요, 돈은 가까이 있는 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하나님은 결코 멀리계시지 않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손에 쥐고 있는 보이는 권력을 더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과연 왜 그럴까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보다 손에 쥐고 있는 권력이 더 실제적이라고 여기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보이지 않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수백억 원의 돈도, 대통령과 같은 권력도, 세계명문의 졸업장도 제한적 범위 내에서만 그 힘을 발휘할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러한 것들이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불, 여호와의 불로 통과 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더 악하고, 더 교묘한 일에, 그리고 더 어두운 일에 쓰임받기 쉽습니다.
* 세상 사람들의 삶의 실상을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아니!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도 없습니다. 살짝만 훑어보아도 잡동사니 같은 일에 얼마나 열정을 쏟고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명품가방 몇 개씩 사 모으는 일, 몇 채의 집문서, 땅문서를 모으는 일, 리조트에 골프회원권을 몇 개씩 소유하는 일, 전세 값으로도 못사는 보석 골프채를 소유하는 일........ 이러한 것들이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요? 조금이라도 가치가 있으면 다행이겠지만 아쉽게도 그러한 것들은 전혀 소용이 없는 잡동사니의 일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결국은 영혼구원에 있습니다.(벧전1:9) 진짜 사람인 영혼이 저주와 죽음으로 버림받는 다면 온 세상을 다스릴 만한 권력을 소유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잡동사니로 취급받을 일에 몸과 마음과 생명을 빼앗길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처럼 제대로 하나님을 깨닫고 영원한 생명, 영원한 보배를 위한 일에 온 생명 걸어야 합니다.
* 오늘본문 10-11절의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의 명하신 바에 순종을 지나 복종하며 서슴없이 이삭을 잡으려는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급하게 붙잡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의미는 “이제 됐다. 그만 충분하다. 이제 나를 향한 너의 믿음을 내가 보았다 하심” 입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헌신, 아니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없는 지경까지 나아갔습니다. 자식을 죽이는 것은 곧 자신을 죽이는 것 이상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목숨이상의 것도 드리겠다는 신앙이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당신의 벗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2:23)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아브라함의 경지에 까지 이를 수는 없을까요? 이제는 어린아이 같은 유아기적 믿음은 다 던져버리고 모세와 다니엘과 삼손과 다윗과 사무엘에 버금가는 믿음의 용장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급하게 이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음성의 또 다른 의미는 본문 12-13절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이삭이 아니야. 내가 제물을 준비해놓았어. 생명까지 바치고자 하는 믿음의 사람에겐 내가 늘 그에 합당한 것으로 준비해주겠다.” 하심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숨을 다해 헌신하는 성도들의 삶에 늘 그에 합당한 것으로 준비해 놓고 계십니다. 나를 위해서 준비해 놓으시는 하나님! 그래서 ‘여호와 이레’는 믿음의 용사들이 부를 매일의 찬송인 것입니다.
*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시작을 보려면 자신의 끝에까지 도달해야 한다.” 목숨을 다하는 신앙으로 하나님의 뜻을 향해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다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요구하십니다. “너의 믿음도 이제는 합격하는 믿음이 되어야 하지 않겠니? 이젠 됐다 할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해 보렴. 오늘 너의 삶에 자녀를 빼앗기는 것 같은 절박함은 무엇이냐? 문제는 나에게 맡기고 목숨을 다하여 충성하렴. 그러면 예비 된 은혜를 맛보리라.”
*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온 세계는 사람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또한 지금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는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그 은혜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 하나님께서 오늘은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이시대의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이 되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