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이런 질문으로 증언을 시작하겠습니다. 한강에 물이 흐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생물이 그 생명을 잃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흐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영혼이 죽습니다. 영혼이 죽었다는 것은 살았다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진정 하나님의 말씀이 쉼 없이 흘러넘치고 있습니까?
* 지극히 평범하였으나 자녀가 없어서 하나님 앞에 간절하고도 더욱 간절했던 한나의 기도(삼상1:10) 가운데 태어난 사무엘은(하나님께서 들으신바 됨) 젖 뗄 무렵인 세 살 혹은 다섯 살 무렵부터 엘리제사장에게 맡겨져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엄마의 품에서 아직 한참 자라나야 했을 때부터 성전의 삶을 살게 된 것은 어머니 한나의 서원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않겠나이다.”(삼상1:11) 엄마의 품이 아닌 하나님의 품에서, 가정이 아닌 여호와의 성전에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후일에 하나님의 최고의 은혜와 복과 영광을 누리는 길이 되었습니다. 왕정시대를 이끌었던 최고의 선지자요 제사장이었으며 빛나는 사사로 쓰임 받으면서 그가 말한 것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결실하였기 때문입니다. (삼상3:19) 말하는 것마다 열매 맺는 삶! 최고의 은혜입니다.
* 엘리 제사장에게 맡겨진 어린 사무엘은 제사장의 크고 작은 일들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성전의 문을 열고 닫는 일과 성소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살피는 일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사는 삶이요,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전을 지키는 삶이었으니 얼마나 보배롭고 은혜로운 삶입니까? 이런 사무엘을 향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삼상2:26)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복되고 존귀한 삶은 어떤 삶이겠습니까? 그 삶은 바로 사무엘과 같은 삶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으로 부터 은혜와 은총을 받고, 옆으로는 사람들 사이에서 존귀함을 받는 삶입니다. 이러한 삶은 세상 그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살며, 오직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고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허락해 주시는 하늘의 복입니다. 오늘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나 되어 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삶이 위로는 하나님으로 부터 그리고 옆으로는 헝가리와 유럽과 한국과 온 세계의 사람들에게 은총을 받는 삶이되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총 받는 자의 반대편에 있는 자들은 버림받은 자입니다.
* 이렇듯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은총을 받으며 여호와를 섬기는 삶을 살던 사무엘에게 이전에 없었던 하나님의 부르심이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3절)라고 기록한 것처럼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이 들려온 때는 어두움이 짙게 깔려있던 시각이었습니다. 당시 성소에는 하나님의 명하심을 따라 매일 저녁마다 일곱 가지로 된 등잔의 등불이 밝혀져 있었습니다. (레24:2-3)
그리고 순결한 감람유로 밝혀진 그 등불은 저녁에 점등되어 동이 터올 무렵의 새벽까지 밝히도록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두들 곤히 잠든 그 시각, 하나님을 향한 순결의 빛만 오롯이 타오르는 그 성전에서 사무엘을 부르는 음성이 들렸던 것입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넘치는 은혜입니다. 저는 열망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시기를.........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말입니다. / 그러자 사무엘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며 엘리제사장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님께서 부르셔서 제가 여기에 왔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러나 엘리제사장은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다시 가서 자거라” 합니다. 그리하여 사무엘은 다시 자리에 돌아와 누웠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또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렇게 세 번을 거듭해서 자신을 부르는 음성이 들릴 때마다 사무엘은 제사장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제야 엘리제사장은 어린사무엘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이 임한 것을 깨닫고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9절)
* 우리는 이 지점에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엘리제사장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 영광스런 대제장직을 수행하고 있던 자신에게는 들려오지 않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저 성전의 심부름꾼 같은 사무엘에게 임하였을 때 그의 마음이 어땠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꼬마 사무엘을 찾으시는 것일까? 말씀하실 것이 있으시면 나에게 말씀하셔야지? 나를 통해서 말씀해 주시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하나님께서는 왜 대제사장인 내가 아닌 사무엘을 부르실까?” 분명 엘리제사장의 마음에선 그러한 의문이 들었을 것입니다.(17절) 그리고 그 궁금증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살았는가? 내가 제사장으로서 그 사명에 충실했는가? 나는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자녀들을 부지런히 가르쳤는가?”
*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흐르지 않는 사람은 막힌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흐르지 않는 시대는 암흑의 시대입니다. 암흑의 시대는 삶이 어디로 가는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모두가 자신이 행하는 일이 옳고 자신이 말하는 것을 진리라고 주장할 뿐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막히면 교만하여져서 제멋대로 행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막히니까 옛사람이 날뛰어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희미하면 육체의 욕구대로 살게 됩니다. 그리하여 온갖 세상의 더러운 것들이 그 삶에 창궐하게 됩니다. 마치 전염병처럼 세상이 그 몸에 붙어 다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삶속에 굽이치지 아니하면 강성하던 것은 연약함으로, 부요하던 것은 가난함으로, 넘치던 것은 모자람으로, 형통했던 것은 불통으로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굽이쳐 흘러야 합니다. 말씀이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빌2:16)
* 홉니와 비느하스는 대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들 역시도 제사장으로서 성전의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제사장의 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맡기신 가장 영광되고 거룩한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홉니와 비느하스는 큰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을 향하여 불량자요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삼상2:12)
과연 그들은 무엇 때문에 제사장의 아들이었음에도.......아기 때로 부터 하나님께 제사 지내는 것을 보며 자랐음에도........그리고 현재 성전에서 제사장직을 수행하고 있었음에도 불량자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비극의 이름을 얻게 되었을까요? 사무엘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받았던 은총보다 훨씬 크고 보배로운 은총이 바로 그들의 차지가 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책망이라니 말입니다.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데 하나님을 모릅니다. 하나님을 배운다 하는데 깨달음이 없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와 있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비극입니다.
* 엘리와 그 아들들이 하나님 앞에 범한 죄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제사의 제물을 제 멋대로 탐내어 먹어치웠습니다. 제사의 순서도 어기고서 제물을 빼앗아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회막문에서 성전의 일을 돕던 여인들을 욕보였습니다. 그리고 엘리는 그러한 아들들의 그릇됨을 엄하게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삼상2장)
아! 말씀이 단절된 삶이여! 아! 하나님의 말씀에 무관심한 세대여! 결국 그들은 본문 11절의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의 법궤가 블레셋 족속에게 빼앗김을 당하고, 실로의 성전이 파괴되고,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쟁터에서 한 날에 죽음을 당하고, 엘리의 며느리가 해산하다가 숨을 거두는 참혹한 일들로 심판을 받습니다.
* 형제자매 여러분! 이 땅이 아닌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우리 성도에게 가장 영광된 일은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이 끊임없이 내려오고 그 말씀이 나를 통하여 세상을 향하여 쉼 없이 흐르는 삶입니다. 또한 우리성도에게 가장 복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막힘이 없이 들려오고 그 말씀이 내 삶의 자리에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이루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신분인데 하나님의 말씀이 흐르지 않는다면 그보다 비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허수아비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으로 선택받았다하는 성도들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의 일들이 열매 맺지 못한다면 그보다 슬픈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십년, 이십년, 삼십년....... 믿으면 믿을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거침없이 흘러내려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얼굴에서 기름기가 흐르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길 속에 물질과 명예가 쏟아져 내리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의 권세와 힘이 넘치는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최대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이상과 기적이 강수가 되어 흐르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뛰는 삶은 100미터만 달려도 아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힘으로 달리는 삶은 일평생 뛰고서도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우리의 힘이요 능력입니까?
* 지난 화요일 세 명의 청년들이 찬양을 듣고 있었습니다. 다들 가장 젊은 시절을 지나는 아가씨들이었습니다. 두 명은 헝가리인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미국인으로 플로리다 주에 살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자 “우리는 카톨릭인입니다. 우린 프로테스탄트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당신의 신앙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며 복음을 거절하려 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나와는 상관이 없다 하는 것입니다. 충격입니다. 복음을 왜곡한 그릇된 가르침의 결과입니다. “아닙니다. 한 하나님입니다. 한 믿음이며 한 은혜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성경입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라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대화는 진지하고 분명하게 저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들의 심령이 진리에 끌리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신 것입니다. 아주 집중하여 듣는 그들에게 “믿음은 카톨릭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카톨릭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서 꽃이 피도록 힘쓰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서 열매 맺도록 수고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사람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라고 권면해 주었습니다.
* 이제 오늘 본문 1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시는 그 부름 속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까요? 그것은 그동안 막혔던 하나님의 말씀이 사무엘 너를 통하여 흐르게 하겠다. 말씀이 희귀하여 향방 없는 암흑의 시대, 하나님의 이상이 보이지 않는 소망을 잃은 시대에 너를 통하여 광명을 말하고 너를 통하여 소망이 흐르도록 하시겠다. 하심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신 또 다른 의미는 대제사장의 가문 엘리와 그의 아들들이 아니라 바로 사무엘 네가 나의 뜻을 이루는 종이 되리라 하심입니다.
* 사무엘은 뜻밖의 사람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의 가문에 대한 하나님께서 세우신 본래의 뜻은 아론으로부터 시작되어 엘르아살, 비느하스, 아비수아, 그리고 엘리제사장과 그 아들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로 이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던 대제사장의 가문을 옆으로 제쳐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전연 뜻밖의 사람이었던 사무엘을 그 자리에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사람의 마음에 알맞은 사람이 알맞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의 눈엔 뜻밖의 사람으로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에 알맞은 사람이 결국 보배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사람들일까요? 진정 하나님의 마음에 알맞은 사람들 맞습니까? 진정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알맞은 사람!” 세상에선 외톨이여도 괜찮습니다. 사람들에겐 주목 받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특별한 가문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엔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엔 반드시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보배로운 은혜와 은총과 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 형제자매여러분! 사울을 부르신 하나님!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그리고 사무엘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오늘은 여러분과 저를 부르십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나님의 말씀이 흐르지 않아 향방 없이 달리는 이 어두움의 시대에 바로 우리가 빛이 되라고 하십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나님의 이상이 보이지 않아 소망을 잃은 이 시대에 바로 우리가 소망을 증언하는 사람이 되라고 부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