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세기 동방의 유명한 설교자로 ' 황금의 입'(Chrysostomos /Golden-mouthed)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요한 크리소스톰 (AD347-407)이 부패한 사람들의 죄악을 꾸짖고 당시 황후였던 유독시아의 사치를 나무라다가 유배를 가면서 다음과 같은 말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할까? 죽음인가? 아니다. 나의 생명은 그리스도께 감추어져있다. 내가 사는 땅에서 쫓겨나는 것인가? 아니다.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다. 나의 소유를 잃는 것인가? 아니다. 내가 이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은 없고 떠날 때도 가지고 갈 것은 없다. 나의 보화는 하늘에 감추어져 있다. 저들이 나를 쫓아내면 나는 엘리야처럼 될 것이고, 저들이 나를 구덩이에 던져 넣으면 나는 예레미야처럼 될 것이고, 굴에 던져 넣으면 다니엘처럼 될 것이고, 돌로 친다면 스데반처럼 될 것이고, 목을 벤다면 세례 요한처럼 될 것이다.
그리고 나를 매질한다면 나는 사도 바울처럼 될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이 놀라운 불굴의 담대함, 흔들림 없는 이 평안의 힘은 과연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요? 이사야서 26장 3절에서 말씀합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신뢰하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불굴의 담대함과 흔들림 없는 평안으로 승리하게 됩니다. 과연 오늘 나는 누구입니까? 두려움과 근심걱정에 휘둘리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조건에 관계없이 날마다 감사 찬송이 흘러나는 평안의 사람입니까?
* 약 65세 정도 된 할머니가 복음전하는 제게로 다가왔습니다. “세상에 당신의 목소리가 어떻게 그렇게 좋습니까? 당신은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노래가 내 영혼에 다가왔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평안에 대한 주제로 바뀌었습니다. “그러게요. 당신의 말씀처럼 인생길에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글쎄, 나는 얼마 전 까지 우리 아파트에 새로 이사 온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날마다 소리 지르고 남을 전혀 배려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난 그들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평안까지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난 결정을 했습니다. 이사를 가야겠다고 말입니다. 겨우 집이 팔렸습니다. 그러나 살던 집보다 훨씬 좁은 집으로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집값을 형편없이 받았거든요. 집의 크기가 거의 반으로 줄었습니다. 그럼에도 좋습니다. 잃었던 평안을 다시 찾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좋았는데……앞으로 어떻게 될지.......이 평안을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할머니는 그간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다시 찾은 평안으로 행복해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평안이 그렇게 중요하군요. 참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평안은 어디에서 올까요? 그 평안이 진짜인데요.” 그러자 할머니는 자신의 손을 하늘로 가리키며 “그 평안은 저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할머니는 아직 하나님을 믿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지만 영혼으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참 평안, 깊은 평안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일치할 때 임합니다. 하나님은 평안을 친히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저의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라.”(대상22:9)
* 성서주석가로 유명한 매튜 헨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평화는 너무나 값진 보석과 같아서 그것을 위해서라면 진실을 제외한 모든 것을 다 내놓겠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의 평안은 그 만큼 절대적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평안을 갈망하고 추구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평화, 평안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사람은 조금 전 그 할머니처럼 많은 손해를 보더라도 이사를 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빌려주었던 돈을 아예 포기해버립니다. 평안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 분분의 사람들은 평안을 얻기 위해서 높은 지위와 권력과 재물을 얻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뜁니다. 지위와 권력과 돈과 명예가 평안을 가져다준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즉, 지위와 권력과 돈과 명예가 가져다주는 평안은 일시적이고 제한적이며 부분적이요 조건적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계속해서 더욱 충족되지 못하면 평안 역시도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르면 더 오르려 하고, 쌓으면 더 쌓으려하고, 모으면 더 모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쉽게도 곧 무너져 내릴 바벨탑이 됩니다. 참 평안은 외적인 것이 아닌 내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 요즘 언론에 계속 오르내리는 전두환 전 대통령일가의 형편을 보면서 그들의 삶이 참으로 안타깝다하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절대 권력을 쥐고서 마구 흔들 때는 몰랐는데 권력에서 내려오자 그 때부터 고난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백담사로 쫓겨나고, 법정에 세워지고, 감옥에도 갇혔습니다. 이 정도 했으면 지난 삶을 회개하고 영혼에 평안을 누리고 구원받을 삶을 위해 철이 들었어야 했는데 그들은 그러질 못했습니다. 권력을 쥐고 있을 때 모아놓은 수천억 혹은 수 조원의 돈을 의지했기 때문이었을까요? “너희들은 몰라. 나에겐 쥐고 있던 권력에 못지않은 돈이 엄청 있거든.” 여전히 국민을 우롱하고 기만했습니다.
심지어 전 재산이 29만원 밖에 없어서 추징금을 못 낸다는 말도 아닌 말을 하며 Comedy 아닌 Comedy를 부렸습니다. 그런데 작금, 그 가족들이 줄줄이 감옥에 갇히게 될 상황으로 몰리니까 수천억 원의 추징금을 자진 납부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저는 참으로 궁금합니다. “그들은 도대체 영혼이 있는 사람들일까?” 하고 말입니다. 영혼이 있다면 진정한 평안을 갈구할 것이고, 진정한 평안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임한 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스도께로 나아올 텐데 말입니다. 그들이 이시대의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을 좀 보세요. 권력도 명예도 돈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힘써 찾아야 할 것은 일시적이요 제한적이요 부분적인 평안이 아닌 영원하고 완전한 평안이어야 합니다. 과연 그 평안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모든 것의 홍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홍수시대인가? 먼저 이미 잘 알고 계시듯이 먹는 것이 차고 넘치는 홍수시대입니다. 먹을거리가 얼마나 많은지 골라 먹을 정도를 지나서 돈을 들여 살을 빼겠다고 난리입니다. 원 푸드 다이어트, 분유다이어트, 황제다이어트, 계란다이어트, 야쿠르트다이어트, 반창고다이어트를 넘어서서 병원에까지 가서 관리를 받을 정도입니다. 그러고 보니까요 다이어트도 홍수입니다. 또한 옷도 홍수시대입니다. 과거에는 옷이 없어서 꿰매 입고 또 꿰매 입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옷장마다 옷이 차고 넘칩니다. 옷이 없어서 못 입는 것이 아니라 싫증나서 안 입습니다. 그래서 명품 아니면 입으려 하지 않습니다. 마이크 제이콥스, 버버리, 휴고보스, 샤넬, 구찌, 베르사체, 불가리...........그러고 보니 명품도 홍수입니다.
또한 자동차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래전엔........불과 몇 십 년 전이지요. 거의 모든 사람이 다 걸어 다녔습니다. 기껏해야 달구지나 노새나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버스도 얼마나 귀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은 현대, 기아, 쌍용 등 우리나라 자동차뿐만 아니라 포드, 오펠, 폭스바겐, 피아트 등 셀 수도 없는 자동차 회사에서 수많은 종류의 자동차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자동차도 홍수 시대입니다.
* 그런데 이런 풍족함이 넘치는 홍수시대를 사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겐 과거의 사람들이 가졌던 여유로움과 평안함이 부족하여 행복지수가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토록 맛깔스럽고 고급스런 양식을 수없이 먹음에도............ 그 아름답고 화려한 옷을 날마다 번갈아 입음에도 그리고 그 좋은 차를 어쩌다가 아닌 매일 타고 다님에도 왜? 평안을 누리지 못할까? 왜 행복하지 못할까? 그러고 보니 참 평안은 육체를 즐겁게 한다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 평안! 어디에서 시작될까요?
* 요한삼서 1장 2절에서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말씀은 우리들의 삶의 순서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영혼이 먼저이지 육체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내면이 문제이지 외적인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입니다. 특별히 이 말씀에서 “영혼”으로 번역된 헬라어 “헤 프쉬케” 는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된 ‘영적인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흙으로 만들어진 우리인생에서 최우선 순위가 되어야 할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고 모으고 쌓은 것만이 그 삶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도하여 참 행복을 맛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들이 집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영혼의 힘, 예수그리스도입니까? 아니면 육체의 힘, 권력과 명예와 돈입니까?
*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1.세상이 주는 평안은 여건에 기초한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관계에 기초한다. 2.세상이 주는 평안은 능력에 의지한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영적인 상태에 의존한다. 3. 세상이 주는 평안은 결과와 그에 따른 성취에 의존한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오늘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기인한다. 4. 세상이 주는 평안에는 문제가 없어야 한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고난 중에도 있다. 5.세상이 주는 평안은 눈에 보이는 것에 의존한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영원한 약속에 의존한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생각과 일치합니까? 오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으로부터 얻어지는 평안과는 전혀 비교할 수없는 평안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은 십자가를 통하여 주시는 구원과 영생이 보장된 평안이며 주님의 영광된 죽으심으로 확증된 영원하고도 완전한 사랑이 담긴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평안입니까? 세상이 주는 평안입니까? 주님이 주시는 평안입니까? 선택!!!
* 우리가 하루의 고단한 삶을 마감하고 집에서 두려움에 떨지 않고 깊이 잠들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고급 주택이거나, 집안에 들여놓은 가구가 최고급이거나, 침대가 포근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월세를 살지라도, 침대가 아닌 맨 바닥일지라도 평안히 잠 들 수 있는 그 힘은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그 손으로 친히 품어주시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나의 아바 아버지이신 하나님! 또한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서 어디론가 여행을 합니다. 그때 추락할까봐 무서워서 발을 동동 구르지 않고 평안히 갈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내가 타고 있는 비행기가 점보여객기거나, 베테랑의 조종사가 조종을 해서가 아닌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음마저도 기꺼이 감당하시고 나를 신부로 맞이하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임마누엘로 함께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나의 주님! 또한 자녀들을 생각하면 견고하고 넘치는 소망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 자녀가 장학금을 받고서 학교를 다니기 때문이거나 잘 생겨서가 아닙니다. 비록 걱정을 많이 끼칠지라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선한 목자가 되셔서 그 아들을 친히 붙드시고 장차 보배로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선한목자 나의 하나님!
*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두고두고 묵상하고 삶에서 열매 맺어야 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삶에서 열매 맺을 수 있다면 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천국의 평강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심령이 가난하면 즉, 우리의 심령이 가장 크고 가장 영광스러운 낮아짐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로 채워지면 세상의 것들을 향한 탐욕이 뿌리 뽑히고 자신의 육체의 욕망이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유도, 절망하는 이유도, 그리고 근심하는 이유도 실상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 세상의 것들을 향한 탐욕과 육체가 요구하는 욕망이 뿌리 뽑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는 평안이냐? 근심과 걱정이냐? 를 결정하는 절대 힘이 됩니다.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며 그리스도로 부흥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에게 세상이 줄 수없는 평안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그 어떤 상황 그 어떤 환경 앞에서도 요동하지 않는 평안의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심령을 가장 크고 가장 영광스러운 낮아짐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로 채울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