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과 같은 질문을 드리면서 오늘의 말씀을 증언하고자 합니다. 과연 총과 칼과 폭탄이 난무하는 전쟁의 때에 땅을 구입할 사람이 있을까요? 또한 목숨을 위협하는 재난이 몰아닥칠 때에 집을 건축할 사람은 과연 있겠습니까? 그리고 자신의 조국이 적들에 의해 함락될 위경에 놓인 때에도 초연히 사과나무를 심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결코 그런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전쟁과 재난과 위경의 때는 소망을 심을 때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땅을 사고 집을 짓고 과수원을 가꾸는 일들은 무언가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질 때 행하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절대전능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우리성도들은 그 어떤 환경, 심지어 절대절망일수밖에 없는 암울한 환경 속에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여겨지면 땅을 사고 집을 짓고 사과나무를 심는 것 같은 소망의 일들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성도들이 그 어떤 상황 그 어떤 환경 앞에서도 소망의 사람으로 견고하고 힘 있게 살아갈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사람으로 절망하게 하고 낙심하게 하는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지존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 분께서 친히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소망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시편91편 4-7절의 말씀입니다. “주는 주의 깃털로 여러분을 감싸 주시고, 주의 날개 아래 여러분을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주의 신실하심이 여러분의 갑옷과 방패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밤의 적막함이 여러분을 두렵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낮에 날아다니는 화살이 여러분을 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밤중에 퍼지는 전염병도 여러분을 두렵게 하지 못하고, 대낮에 닥치는 재앙도 여러분을 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천 명이 여러분의 옆에서 죽어 엎드러지고, 만 명이 여러분의 오른편에서 쓰러질지라도 여러분은 조금도 다치지 않을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충만해야할 근거는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완전하고도 실제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자신을 완전하게 다 찢어 성취하신 신실하고도 거룩하신 사랑이 있기에........그리고 그 놀라우신 사랑이 하나님의 자녀 된 나를 위한 것임을 믿기에 걸음걸음 소망으로 채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 지난 주 독일의 총선에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2005년, 2009년에 이어 다시 승리를 했습니다. 이로써 전설적인 3선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메르켈은 여성입니다. 그녀가 3선의 영광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안정적인 경제운용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내면을 주도하고 그 삶을 이끌었던 힘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그녀의 삶을 주도한 것입니다. 그녀는 소박한 시골에서 사역하던 루터교회의 목사의 딸이었습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던 시골소녀였던 것입니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독일 최고의 지도자가 되어 유럽의 경제위기 극복과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개혁을 이끌게 되었는가?
* 그녀의 부친인 호르스트 카스너 목사는 본래 서독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1954년 동독의 목사들이 자유를 찾아서 서독으로 탈출하던 때에 오히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동독으로 갔습니다. 그런 아버지와 함께 공산주의 체제였던 동독에서 신앙인으로 그리고 목사의 딸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조롱과 핍박이 난무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앙하였고 그런 그녀를 하나님께서는 독일의 총리라는 존귀한 자리로 거듭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잠4:8) 하신 말씀이 그녀의 삶에서 그대로 열매 맺은 것입니다.
* 메르켈총리는 지난해 11월, 선거 운동 중 한 신학생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신앙은 내 인생의 동반자입니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기독교인, 게다가 목사의 딸로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몰아치는 낙심과 절망의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메르켈 총리는 그 싸움에서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망을 품고 그 소망을 열매 맺을 것을 꿈꾸며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대로, 그 소망대로 열매 맺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만일 그녀가 공산주의 체제라는 낙심과 절망의 틀에 무릎을 꿇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목사의 딸을 더욱 괴롭히는 어두움의 환경에 그대로 통치 당했더라면 어땠을까요?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을 버리고 공산주의 체제에 순응하며 살았다면 핍박도 당하지 않고 어느 정도 쉽게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랬더라면 지금처럼 결코 한 국가의 수장이 되어 하나님의 정신과 지혜로 민족을 이끌어가는 복을 누리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오직 하나님께 소망이 있고, 오직 하나님께서 그 소망을 가꾸시며, 오직 하나님께서 그 소망을 결실하게하십니다. 그분은 불가능이 없는 전능이시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보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며, 우리를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모든 왕의 왕이 되시며, 모든 주의 주가 되십니다.”(딤전6:15)
*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은 불치병이라는 절망의 환경 앞에서도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치유와 회복’이라는 소망행진은 무려 12년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의사라는 의사는 다 찾아다니며 재산의 재산을 다 허비하였지만 오히려 더욱 악화된 자신의 상태를 보면서 절망하고 포기했을 법 한데 그녀는 절망과 포기라는 늪에 자신을 가두어 두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녀의 지칠 줄 모르는 치유와 회복을 향한 소망행진은 전능이신 예수그리스도께로부터 결실을 맺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 할지어다.”(막5:34) 또 어디 그뿐입니까? 베데스다 못가에서 물이 동하기를 38년간이나 기다리며 회복과 치유를 향한 소망행진을 했던 병자는 어떻습니까? 반평생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병석에 누워있었지만 그 역시도 소망을 품고 베데스다 못가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포기했어도 벌써 포기했어야 했었는데, 정말로 가능성 제로의 어두움의 환경이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소망을 품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의 소망 행진도 결국 영광의 왕이시오, 생명의 생명이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요5:8) 사랑하는 여러분! 그 어떤 환경, 그 어떤 상황, 그 어떤 현실 앞에서도 소망으로 견고하고 소망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전능이시오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말씀하시면 길이 열리고 그분이 손을 대시면 소원이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 이제 오늘본문말씀으로 가보겠습니다. 유다 왕 시드기야의 궁중 시위대 뜰에 갇혀있던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다는 것은 언제든지 죽음가운데서도 생명이요, 절망가운데서도 희망이며, 실패가운데서도 승리를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늘 심령에 들리는 삶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명하신 말씀은 그의 숙부였던 하나멜의 소유인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라는 것이었습니다.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렘32:7) 그러나 하나님의 이 명령은 사실, 실행으로 옮기기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적대국이었던 바벨론에 의하여 곧 철저히 부서지고 함락될 것이며, 유다 백성 중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의 노예로 끌려가는 참혹한 일들이 닥쳐올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예레미야 자신도 유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시드기야 왕이 포로로 잡혀가게 될 것이라는 절망의 예언을 했다는 이유로 왕궁 시위대 뜰에 갇혀서 어찌 될지 모르는 절체절명(絶體絶命: get into a desperately dangerous situation)의 위기 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 민족적으로도 절대 암흑이요 자신에게도 결코 소망을 말할 수 없는 어두움의 현실 앞에 놓여 있는데 어떻게 한가하게 땅을 살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땅을 사라하십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절망의 때일지라도 그 절망에 통치당하지 말아라! 실패했을지라도 그 실패에 노예 되지 말아라! 하심입니다. 절망의 때는 있겠지만 곧 자유를 주며, 암흑의 시간은 찾아오겠지만 곧 광명으로 바꾸어 주는 전능자인 내가 함께 하겠다 하심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이같이 말하노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렘32:15)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는 실패는 실패가 아니며, 아픔은 아픔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보이지 않은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를 통하여 완전한 승리를 주시며, 아픔을 통하여 온전한 회복을 주시고, 보이지 않던 것은 분명한 실체로 나타내 주시기 때문입니다.
* 야훼 하나님의 전지전능은 바람 잘날 없는 사막 같고 가시덤불 같은 인생이라는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에게 언제나 충만한 희망이 됩니다. 그래서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로서 ‘희망의 신학자’ 로 불리는 위르겐 몰트만은 “암울한 현실에도 희망의 빛은 꺼지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 한 어떤 환경 속에서도 희망은 유효하다.”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온 각자의 삶의 여정을 잠시 돌이켜 보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이십년, 어떤 사람은 삼십년, 혹은 사십년, 오십년을 넘게 살아왔는데 과연, 하나 이겨내고 나면 또 다른 암흑 같은 현실 앞에 마주서야 하는 우리인생을 오늘 이 자리, 이 지점까지 서게 한 힘은 무엇입니까? 어려움의 고비, 절망의 언덕, 그리고 숫한 실패의 산등성이를 어떻게 넘어서서 이곳까지 이르렀습니까? 여러분! 어떻습니까? 오늘의 여러분의 삶을 누가 인도하였습니까? 저는 아무리 돌이켜 생각을 해 봐도 오늘의 나의 걸음은 나의 힘과 능력과 재능이 아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고 밖에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의 피난처에 사는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늘 밑에서 편안히 쉬게 될 것입니다”(시91:1)
*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 더욱 그리고 더욱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더욱 그리고 더욱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전능자께서 자신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32장 27절입니다.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오늘 여러분의 삶에 던져진 크고 작은 숙제들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오늘 여러분의 영혼에 어두움을 드리우며, 무엇이 여러분으로 한 숨과 깊은 고민에 빠지게 합니까? 무슨 염려와 걱정이 있어 잠을 설칩니까?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Is anything too hard for me?” 물어 오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가슴에 새기고 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가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께 절대 소망을 두고 살아가면 육체 안에 갇혀있는 나는 볼 수 없어 절망하지만 전능자께서는 세세히 보시고 복이 되도록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 절대 신뢰를 두고 살아가면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나 하나님께서는 절대 가능, 완벽한 형통의 길로 친히 세워 가십니다.
하나님의 성도된 우리가 그 어떤 절망의 환경 앞에서도, 그 어떤 암흑의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소망행진을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언제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성도는 사방으로 포위를 당해도 여전히 집을 짓고,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환경에 놓였을 지라도 아름다운 꿈과 비전을 세우는 소망의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형제자매여러분! 여전히 내일을 소망하십시오. 여전히 복된 꿈과 벅찬 비전으로 삶에 충만하십시오. 이러한 은혜가 여기에 모인 우리모두위에 가득하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