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증언은 독일최고의 시인으로 불리며 동시에 고결한 영혼의 시로 전능자를 노래했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년 12월 4일 ~ 1926년 12월 29일)의 고백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제 눈을 감겨 주소서. 주님을 볼 수 있도록. 제 귀를 막아 주소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발이 묶여도 저는 주님께 가렵니다. 혀가 없어도 주님께 기도하렵니다. 제 팔을 꺾어 주십시오. 주님을 껴안도록. 손으로 잡듯 제 마음으로 주님을 잡도록. 제 심장을 결박하소서. 그러면 제 뇌가 박동할 것입니다. 제 뇌에 불을 붙이시면 저는 뇌에서 흐르는 핏줄기로 주님을 전하겠습니다.” 과연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이런 깊은 헌신의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은 시간도, 물질도, 몸도, 마음도, 그리고 목숨까지도 빈틈없이 다 내어 드리고서도 겸손으로 허리를 동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전능자를 향한 사랑은 어떻습니까? 릴케를 넘어설 수는 없을까요?
* 우리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신 하나님의 소유였습니다.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사43:7)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기쁨이요, 보배요, 행복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그런 존귀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의 결과로 우리 사람들은 그 영광의 자리에서 죄인의 자리로, 생명의 자리에서 죽음의 자리로 운명이 뒤바뀌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체 안에서는 매일 매 순간,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홀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미친 짓이 끊임없이 자라나고 또 다시 자라 오릅니다. 사망에 통치당하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그런 처참한 본성가운데 있던 우리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덧, 이 땅의 것에 욕심내는 것이 아닌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육체를 만족하게 하고자하는 삶이 아닌 가난한 사람, 외로운 사람들을 보면 긍휼이 샘솟는 마음까지 지니게 되었습니다. 또한 실패하고 낙심하며 눈물 흘리는 연약한 사람들의 마른 손을 잡아 주는 사랑의 삶까지 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아름다운 변화요 성숙입니다. 죽음이었는데 다시 생명으로, 죄인이었는데 다시 은혜를 입은 의인으로, 저주였는데 다시 축복으로 뒤 바뀐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큰 은혜를 입은 것입니까?
*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5:10) 놀랍고 놀라운 은혜요 큰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이 날마다 고백하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116:12) 그렇습니다. 자신을 통째로 삼키고 있던 죄악의 본성으로부터 벗어나 그리스도의 말씀을 삶에서 차근차근 열매 맺는 기쁨을 알아가는 사람은 은혜를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 안에 샘솟듯 솟아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온 몸으로 증언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오늘 우리는 진정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있습니까?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진실로 깨달았다면 우리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향한 불타는 충성과 끊임없는 헌신이 샘솟을 것입니다. 신실한 주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 세례요한의 삶은 인간적인 안목으로 볼 때 참으로 안타깝고 비극적인 삶이었습니다.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엔 가죽 띠를 띤 특이한 모습과 함께 메뚜기와 석청을 먹는 정상적인 삶의 범주에서 벗어난 생활을 하다가 종국에는 참수형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안목이 아닌 영의 눈으로 보면 세례요한은 최고의 삶을 살다가 최고의 나라를 유산으로 상속받은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116:15) 세례요한이 최고의 복을 받은 사람으로 불려야 하는 이유는 장미가 아낌없이 그 향기를 뿜어내듯이, 가을국화가 한 잎도 감추지 않고 그 아름다움을 다 보여주듯이 완전한 충성과 헌신, 그리고 택함 받은 종으로서의 삶을 빛나게 그리고 처절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 그는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사40:3) 하신 예언자의 말씀이 자신의 삶에서 온전히 열매 맺기를 열망했습니다. 그리하여 메뚜기와 석청으로 표현된 거친 음식을 먹으며, 약대털옷과 가죽 띠라는 세상과 결탁하지 않은 모습을 하며 광야에서 참 삶, 곧 회개를 외쳤던 것입니다. 그의 거침없는 외침은 시대의 외침이 되었습니다. 그의 담대한 외침은 영혼과 삶의 개혁을 향한 외침이 되었습니다.(눅3:7-14) 또한 그의 삶은 의롭고 거룩하여서 뭇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되기까지 했습니다.(막6:20)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그에게 나왔고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며 진리를 배우려고 나왔습니다.
* 결국 그는 당시의 사람들로부터 높임 받고 힘을 얻고 영광을 받는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그러한 세상에 붙들리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더 강하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그분 앞에 꿇어앉아 그분의 신발 끈을 풀기에도 부족하다.” (막1:7) 하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길로 올곧게 나아갔습니다. 종의 길이요 종의 사명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목숨까지 내어 드리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낮추는 삶이었습니다. 자신을 알고 하나님을 깨달은 은혜가 그 속에서 역사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은혜에 사로잡힌 종이 되고, 사명에 붙들린 종이 되어 헌신한다면 어떨까요? 가정이 달라지고, 교회가 달라지고, 사회가 변혁되지 않겠습니까?
* 종의 본분은 불타는 충성과 끊임없는 헌신입니다.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밭을 갈았다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또한 하루 종일 거칠고 험한 비탈길을 오르내리면서 양들을 돌보았다면 그 얼마나 고단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은 여전히 주인을 섬겨야 합니다. 그가 일터에서 막 돌아왔을지라도 주인에게 필요한 일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현재적 상황에 관계없이 먼저 주인의 일을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종의 신분이요, 그 신분에 맡겨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일터에서 지금 막 돌아왔습니다. 주인께서도 아시듯이 뙤약볕에서 하루 종일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아십니까? 일단 제가 식사부터 하고 난 후에 주인님의 일을 하겠습니다. 제가 조금 쉬고 마무리하겠습니다.” 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아무리 피곤하여도 또한 아무리 쉬고 싶어도 먼저 주인의 일을 온전히 마무리해야 합니다. 그러고서도 주인이 “하루 수고 했네. 고생 많았네.” 하면 “아닙니다. 마땅히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하며 여전히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종에게서의 온전한 충성과 끊임없는 헌신은 그의 마땅한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의 정점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오늘 그분께 어떤 삶을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목숨까지도 드리겠다는 진정한 종의 삶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을 계속 누리겠다는 복음의 수혜자입니까?
* 여러분도 익히 잘 알고 계시듯이 교회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수련회를 다녀와서든지, 혹은 여름 성경학교를 마치고서든지, 교회체육대회를 할 때라든지........ 그 밖의 크고 작은 행사들을 치르면서 시험에 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행사를 하게 되면 크고 작은 헌신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때 성도들이 많은 수고를 합니다. 성도들의 수고가 없다면 교회는 그 어떤 행사도 치룰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수고를 기억하십니다. 그런데 그 시험이라는 것이 대부분 서운함에서 옵니다. “내가 이번 일에 얼마나 많은 헌신을 했는데.......... 내가 교회 체육대회를 준비하면서 밤잠못자고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데......... 내가 여름성경학교 섬기면서 물질로 얼마나 많이 헌신했는데..........” 하면서 시험에 듭니다. 수고한 것에 비하여 인정을 받지 못하면 또한 땀 흘린 것에 대한 반응이 기대한 것에 미치지 못하면 서운함이 밀려옵니다. 그리고 그 서운함은 시험이 되어 같은 성도와 목회자를 아프게 합니다.
*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것에 솔직해야 합니다. 맘에 서운함이 든다는 것은 여전히 인간적인 생각과 열심이 그 마음을 주도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진정한 종은 주인의 일을 하는 것 자체에서 기쁨과 영광을 얻습니다. 그리고 주인을 섬기는 헌신자체가 바로 더 할 수없는 보상이 됩니다. 우리가 매년 노숙인들에게 방한복을 나누어 주면서 경험하지 않습니까? 올 해로 8년째가 됩니다. 내게도 쓸 곳이 많이 있지만 나를 위해 쓰지 않고 구별하여 방한복 헌금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내어 서부역까지 달려와서 그 방한복을 일일이 선물합니다. 그럴 때 얼마나 많은 기쁨과 행복 그리고 은혜를 경험합니까?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이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충성하고 헌신하는 사람에게 하늘로 부터 임하는 것입니다. 하늘 기쁨, 하늘행복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오늘 우리들이 열망하는 기쁨과 행복은 무엇입니까?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아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의 종으로 살면서 누리는 하늘기쁨과 하늘행복이 진정우리들이 열망해야 할 것들입니다. 진정한 종의 삶은 남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오롯이 주인의 일에 충성합니다. 자신을 은혜로 거두어 주신 주인이 그 삶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전부 맞습니까?
* 다음과 같은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좋은 교회, 복된 교회 그리고 은혜와 사랑이 가득한 교회는 과연 어떻게 세워질까요? 누구나 그런 교회를 사모하며 그런 교회로 다니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런 교회로 세워질까요? 목사의 능력이 탁월하면 좋은 교회, 복된 교회,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될까요? 아니면 지식인들, 좋은 전문 직업을 가진 사람들, 물질에 복을 받은 사람들이 모이면 그런 교회로 세워질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교회, 복된 교회, 은혜와 사랑이 가득한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대로 살고자 하는 종의 마음을 지닌 사람들의 충성과 헌신에 의해서 하루하루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한 결 같이 복음의 종, 예수그리스도의 종으로 서로서로 섬기고 헌신해 나가면 좋은 교회, 복된 교회,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교회로 변화되고 세워지는 것입니다. 만일 종은 없고 주인행세만 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 섬김은 없고 대접만 받으려는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 말만하고 행하는 사람이 적은 교회라면 아무리 오래되어도 결코 교회다운 교회로 세워갈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나님을 믿노라’ 한다면 주께서 세우신 교회 안에서 ‘어떻게 하면 참다운 주님의 종이 될까?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섬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욱 힘써 사랑할 수 있을까?’ 를 위해 부지런히 고민하며 실천해야 합니다. 섬김이 가장 높고 사랑이 제일입니다.
* 심어야 싹이 나고, 뿌려야 꽃을 봅니다. 그리고 땀을 흘려야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들의 복음을 향한 헌신은 헌신한 것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심은 대로 결실하게 됩니다. 적게 헌신했다면 적은 열매를 거둡니다. 그러나 많이 헌신했다면 풍성하게 결실합니다. 풍성한 결실을 거두고 싶지 않습니까? 세상의 종은 자신이 주인이 됩니다. 그러나 그는 썩을 육체와 쉬 사라질 땅의 일들을 하다가 영원히 멸망당하는 사단의 종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종은 종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일을 하다가 하늘을 유업으로 받을 상속자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나는 누구입니까? 진정 그리스도의 종 맞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