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3일 본문 :이사야 54장 1-3절/ 마태복음 22장 34-40
제목 : 사랑의 지경을 넓히라
* 오늘은 지난 주 “네 믿음의 지경을 넓히라” 는 말씀에 이어서 “사랑의 지경을 넓히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시작이며 모든 것의 마침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손에 넣었을지라도....... 재력가가 되고, 명예를 얻고, 높은 학식을 갖추어도 사랑이 그 속에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한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고, 천사의 말을 하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결국 사랑은 우리들의 삶에 핵심이요, 정점이 됩니다.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우리 삶의 근본이요, 사랑은 우리의 우리 됨,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나타내는 증명서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12절에서 말씀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는 진정 사랑의 사람입니까? 만일 우리가 사랑의 사람이라면 그 사랑이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맺어야할 곳은 어디일까요? 내가 ‘사랑의 사람됨’을 증명할 곳은 어디인가? 하는 것입니다.
* 그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우리 삶의 시작과 끝이 오직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이미 잘 아시는 스데반 집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초대교회 때 예수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제자의 수가 많아지자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들을 불러서 권면을 합니다. “너희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행6:3)그래서 스데반을 비롯하여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베나, 니골라가 초대교회의 집사로 선택이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 가운데서 유독 스데반 집사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행6:5) 그렇습니다. 스데반집사는 진실로 주목을 받던 성령의 사람이었고 누구에게나 인정받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충만히 임했던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6장 8절에서 말씀합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그렇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이었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스데반에게 특별한 사랑으로 응답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권세와 권능과 영광이 그를 통하여 세상에 마구 쏟아진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의 것들이 그 삶에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십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에 임한 하나님의 것들은 무엇입니까?
* 하나님의 권세와 권능과 영광에 붙들려 예수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스데반에게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당시 각 지역에서 모여온 종교지도자들이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서 스데반을 공회에 세운 것입니다. 눈엣 가시였기에 거짓증인을 세워 제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스데반은 마치 사자 굴에 던짐을 당한 상황과 같은 처지에 놓여있었으나 그의 얼굴은 천사처럼 빛나고 있었습니다.(행6:15) 이제 그가 자신을 집어삼키려 으르렁대는 사람들 앞에서 입을 열어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증언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목이 곧아 있어 겸손할 줄 모르고, 할례 받지 못하여 세상 사람들과 별반 차이 없고 그래서 완전한 하나님이시요 완전한 사람이셨던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처형한 그들의 살인을 고발합니다. 그의 증언이 얼마나 분명하고 예리한지요. 그의 고발이 얼마나 정확하고 힘이 있는지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 받는 사람은 이토록 담대하고, 이토록 지혜롭고, 이토록 진리에 대하여 예리합니다.
* 그러자 공회에 모여 있던 무리들이 마음에 찔림을 당합니다. 그들이 경기할 정도로 찔림을 받은 이유는 스데반의 언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화인 맞은 영혼에 대한 가르침이요, 성령님의 거짓된 양심에 대한 때리심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4절에서 말씀합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공회에 모였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이었다면 이를 갈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으며 회개하고 돌이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종교적인 모습을 하고서 입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했으나 정작 자신들의 마음엔 하나님이 자리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내려지는 진리를 내동댕이쳤던 것입니다. 결국, 스데반 집사는 사랑을 말하나 미움과 시기와 살인을 일삼는 종교지도자들과 그들에 의해 선동된 사람들에 의해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을 위하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헌신했던 최초의 순교자였습니다. 사랑의 힘이 스데반을 순교자의 영광으로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피가 이방선교의 문을 여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어떻게 그분을 사랑하시렵니까? 하나님 사랑이란 입술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 사랑이란 아름다운 문장이 아니라 우리의 뜻과 의지, 그리고 생명입니다. 하나님 사랑이란 그분의 교회를 위한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이란 그분의 사역자들을 위한 사랑입니다. 어제까지 나 자신을 위해 먹고 입고 마셨다면 오늘부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먹고 입고 마심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어제까지 나를 위한 기도가 전부였다면 오늘부터는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와 사역자들과 교회 공동체를 위한 기도로 바뀌어야 합니다. 어제까지는 주님의 교회를 위해 30분 수고하였다면 오늘부터는 1시간 2시간 3시간........ 그 수고의 지경을 넓게 확장해 가야합니다. 어제까지는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손으로 수고하였다면 오늘부터는 발과 눈과 온 몸을 다하여 수고해야합니다. 주님의 교회에 무엇이 필요한지 헤아려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역자들의 필요와 아픔과 고뇌가 무엇인지 깨달아 가장 귀한 것으로(살전5:12-13) 함께 할 수 있는 마음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요,(엡2:22)그리스도의 신부요,(엡5장) 하나님의 양떼(벧전5:2) 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역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요, (고전1:17) 교회를 먹이는 자들이요(요21:15-17)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엡4:12)
* 이사야서 54장 2절에서 말씀합니다. "네 장막 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며, 널리 펴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지경을 넓히시길 바랍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수고를 확장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인 우리들의 교회가 새로워지고 견고해지며 그 지경을 더욱 넓게 넓혀가게 될 것입니다.
* 둘째로 우리가 사랑의 사람임을 드러낼 곳은 이웃 사랑에서 증명됩니다. 그리고 이웃사랑의 방법은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우리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뜻은 “아낌없이 베풀라. 아낌없이 나누어라. 아낌없이 섬겨라.” 하신 의미입니다.
* 정호승시인의 ‘울지 말고 꽃을 보라’에 있는 ‘타조의 꿈’이라는 단편 동화입니다. 하늘을 날고 싶어 하는 타조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하늘을 날고 싶어 하는지 타조는 날마다 그것을 소원했습니다. 다른 타조들은 모두 중간에 그 꿈을 포기했지만 이 타조는 여전히 그 꿈으로 가득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늘을 날 수 있을까? 타조는 하나님께 하소연 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독수리 한 마리를 바람결에 보내 주셨습니다. “독수리야! 어떻게 해야 하늘을 날 수 있을까?” 독수리는 타조에게 자기를 사랑하면 하늘을 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타조는 열심히 독수리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도무지 하늘을 날 수 없었습니다. 슬퍼하는 타조를 향해 독수리가 말했습니다. "아니야. 타조 넌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야. 날고 싶다는 너의 욕망을 사랑하는 거야. 그래 가지고는 날 수가 없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할 때만이 넌 날 수 있어. 사랑에는 조건이 없어야 해. 사랑에는 희생이 따른단 말이야. 넌 그걸 몰라. 우리를 사랑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봐. 맹목적인 부분이 있잖아. 순순한 사랑에는 어느 정도 맹목성이 있어야 해. 고통까지도 받아들이는 그런 사랑 말이야. 그런데 넌 그렇지 못해. 그래서 날지 못하는 거야."
*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 타조도 늙고 독수리도 늙었습니다. 게다가 독수리는 눈까지 어두워져서 먹이 사냥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타조는 굶어 죽기 직전의 독수리에게 자신의 두 다리를 먹이로 주었습니다. 두 다리를 잃은 타조는 자살을 결심하고 스스로 벼랑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타조는 떨어져 죽지 않고 독수리처럼 하늘을 유유히 날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수리를 아낌없이 사랑했던 타조를 어여삐 여기셔서 그의 영원한 꿈인 하늘을 나는 소원을 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은 자기희생을 할 때 그 능력이 열매 맺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이웃사랑은 어떻습니까? 자기희생의 십자가가 드리워져있습니까? 아낌없이 베풀고, 아낌없이 나누고, 아낌없이 섬깁니까? 자기를 찢지 아니하면 결코 사랑은 시작도 완성도 할 수 없습니다.
* 이웃 사랑의 시작은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서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오늘 나와 함께 한 성경을 읽으며, 한 찬송을 부르며,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한 형제 자매된 식구입니다. 우리들의 영혼에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직인을 찍은 깊은 자국이 선명히 새겨있습니다. “가족” 그래서 우리사이에는 허물은 가려 주고, 실수는 덮어주며, 부족함은 채워주는 은혜의 강수가 넘쳐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눈물 흘리는 이가 있다면 나의 눈물로 여기고 함께 아파하고 울어주며, 병든 이가 있다면 나의 질병으로 여기고 힘써 도우며 기도하여 주며, 어려움을 겪는 이가 있다면 나의 어려움으로 여기고 보살펴주는 사랑의 강수가 흘러야 합니다.
* 세상 식구는 이 땅에 속해 있지만 그리스도로 엮여진 하늘 가족은 영원히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이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제까지 하나를 나누는 사랑이었다면 오늘 부터는 두 개를 나누는 사랑으로 그 지경을 넓혀야 합니다. 어제까지 두 개를 나누는 사랑이었다면 오늘부터는 자신의 전부를 나눌 수 있는 지경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어제까지 한 사람만 사랑하는 지경에 머무르고 있었다면 오늘부터 세상 만민을 품을 수 있는 지경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 그리고 내 교회식구들에게 행하는 것처럼 내 이웃, 내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땅의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을 내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면 결국은 내가 부요해 집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깊이와 넓이만큼 행복의 깊이와 넓이가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두 다리를 아낌없이 내어준 타조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면 어떨까요? 주님의 십자가가 오늘 나를 향하여 그 지경으로 나아가자고 요구하지 않습니까?
* 복음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먹고 마십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우리들의 숙명이요 사명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사랑의 넓이가 행복의 넓이입니다. 사랑의 깊이가 삶의 깊이입니다. 사랑의 지경이 인생의 지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