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뒤를 이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여호수아의 인도로 B.C 1405년경부터 약 5년간 가나안 전쟁을 치룬 후 드디어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전쟁의 5년은 과거에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손의 능력을 직접적으로 체험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뼈 속 깊이 새겨 두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 가면서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민족을 위하여 행하셨던 놀랍고 엄위하고 은혜롭고 영광스러운 일들을 다 잊어 버렸습니다. 심지어 가나안의 계명인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삿2:2)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가나안 거민의 신들인 풍요와 다산을 가져다준다는 바알을 섬기고 아세라를 숭배하며 아스다롯을 섬겼습니다. 또한 가나안의 풍습을 따르며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자기들의 딸들을 그들의 아내로 주는 잡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택함 받은 백성으로 이방 민족과 타협하거나 섞이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따르는 순결한 민족이 되라하였는데 그 뜻을 저버린 것입니다. 순결함은 가나안의 거민들과 이스라엘을 구분 짓는 잣대였는데 섞여버리자 그 구분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나와 세상 사람들과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 본문 7절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여기에서 ‘잊어버리다.’ 라는 원어는 ‘솨카흐’인데 그 의미는 ‘잘못 놓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마음에 중심에 모시지 않고 마음의 바깥에 하나님을 내어 놓았다.’ 라는 의미입니다. 한 쪽으로 제켜져 계신 하나님!!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진노하셨습니다. 당신의 친 백성인 이스라엘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넘겨버린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타락을 그냥 두고 보실 리가 없으십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더러움과 불결한 사람들인 가나안인과 섞여 사는 것을 그대로 묵인하신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실 수 없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다움의 선명한 구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언제나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마음은 잘 놓여 있습니까? 혹시 마음 중심에 하나님보다 더 반듯하게 세워놓은 것은 없습니까?
* 본문 8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음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8년을 섬겼더니”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도우심, 복주심의 손이 멈춰지면 구산 리산다임의 손에 넘겨진 것 같은 세상의 세력, 사단의 권세에 의해 정복당하고 통치 받는 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 통치 받는 삶은 은혜요, 복이요, 기쁨이요, 평안이요, 승리요, 감사요, 찬양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세력, 사단의 권세아래 놓였다는 것은 눈물이요, 아픔이요, 괴로움이요, 고난이요, 실패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통치 받는 삶은 참 자유와 승리로 나아가는 삶이지만 세상의 세력, 사단의 권세는 우리를 노예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산다임의 이름의 뜻은 ‘두 배로 악한 구산, 매우 악한 구산’ 이라는 의미로 실제의 이름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과 섞여 사는 것이 풍요와 부요를 얻는 지혜로움이라 여기고,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사는 것이 세련되게 살아가는 시대의 흐름이라 하여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에서 옆으로 비껴놓게 되면 하나님에 의해서 통치 받는 삶과는 전혀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악한 자의 손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고통 받는 삶, 실패하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이 좋아보여서 세상을 따르고 살다보면 처음에 그 좋아보였던 것은 온데간데없고 세상을 품었던 것으로 인하여 오히려 가시가 되어 자신을 찌르는 것을 수없이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의 풍습과 풍조들을 성경으로 통과시키지 않고, 세상의 유행을 주님으로 거르지 않은 채 살면 그것이 곧 그 자신에게 올무가 되어 고난과 고통이 되었던 것을 얼마나 많이 경험하였습니까? 쉬운 예로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세상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이익을 챙기려고 거짓말을 서슴지 않습니다. 또한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권모술수, 사기, 비방, 비열함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택정함을 입은 성도는 결코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거짓말과 권모술수, 사기와 비방은 영혼을 찌르는 가시요 삶을 무너뜨리는 올무가 됨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떡밥 안에 숨겨진 예리한 낚시입니다. 그럴싸해 보여서 입에 무는 순간 그것에 걸려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인 성도의 절대무기는 현실에 눈이 밝은 빛나는 이성이 아닙니다. 세상이 탐낼만한 지식도 아닙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뒤 배경도 아닌 오직 하나님 자신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로마서 11장 33절과 36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 세상의 지혜와 지식이 어찌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쫒아갈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방식이 어찌 하나님의 방식과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온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운행되며 그리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섭리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다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며, 누구를 따르며, 어떠한 방법으로 삶을 살아가야할지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일치, 하나님과의 연합,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외에는 다른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불신의 사람들을 따를 수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과 결코 혼합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길은 오직 하나님이시오,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아무리 가나안 사람과 헷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사람 사이에 거하는 것(삿3:5) 같은 세상 한 가운데 놓여 있다 할지라도 오직 우리의 힘은 하나님이십니다.
* 본문 9절에서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하나님의 손이 이스라엘에서 멀어지자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의해 지배당하던 이스라엘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악독한 가시와 올무가 되었는지 이스라엘이 그동안 한쪽으로 제켜 두었던 하나님을 다시 찾으며 부르짖습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으매”여기에서 ‘부르짖다.’ 라는 원어는 ‘자아크’입니다.
그 의미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는 도무지 그 두 배나 악한자인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아쉬움이 많은 대목입니다. 하나님을 한쪽으로 제쳐놓고 부요와 풍요의 신을 따라간 결과는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아뿔싸! 왜 그 하나님을 잊어버렸단 말인가? 왜 그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지 못했단 말인가? 아! 하나님의 손! 그 영광의 하나님의 손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세상과 섞이지 않고 순결하게 살았더라면!!! 사랑이신 하나님의 그 은혜 그 영광을 더욱 많이 누렸을 텐데.........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은혜이시며, 자비로우시고 긍휼이 충만하시며 구원이십니다. 회개하며 부르짖는 자기 백성들,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자기 사람들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한 구원자를 세우셨습니다. 그는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입니다.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구산 리사다임의 악한 손에서 건져달라고 부르짖는 백성에게 구원자로 세움을 입은 옷니엘은 과연 누구인가? 옷니엘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고난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사람으로 역사 앞에 세워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 여러분! 모든 시대와 역사의 무대에는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사람들은 시대와 역사 앞에 붙들려 쓰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세상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시대와 역사 앞에 쓰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시대와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그분께서 사람을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써 내려가시는 시대의 현장, 역사의 무대 위에 세우실 사람을 찾으십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붙드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까요?
본문 9절의 하반 절을 다시 읽습니다.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여러분 갈렙이 누구입니까? 그는 가나안의 정탐꾼으로 보내어진 12명중의 한사람으로 열 명의 사람들이 절망과 부정적인 보고를 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소망의 선포, 승리의 선포를 외쳤던 믿음의 장부요, 신뢰와 용기의 대사였습니다. 옷니엘을 소개할 때에 갈렙을 소개하였다는 것은 두 사람의 상관관계가 특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갈렙과 옷니엘에게는 하나님의 눈에 합한 공통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소개하지 않고 갈렙이라는 믿음의 장부의 이름을 거론한 것입니다.
* 실제로 여호수아 15장 16-17절에 보면 옷니엘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는 내가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갈렙의 아우요,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취함으로 갈렙이 그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니” 이스라엘의 영웅! 갈렙의 딸을 아내로 맞이할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겠습니까? 또한 과연 어떤 인물이 거인 족속이었던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는 기럇세벨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기와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불굴의 믿음을 지닌 최고의 용사만이 그 영광을 거둘 수 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옷니엘은 하나님만을 신뢰했던 믿음의 장부이었을 뿐 아니라 최고의 용사였습니다. 또한 옷니엘은 이스라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나안 족속과 혼합되고 그들의 신과 풍속을 따라 살던 시대에서도 초연히 하나님께만 믿음을 둔 순결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옷니엘처럼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키기 위해 세상과 싸우는 믿음의 용사가 되어야 합니다. 옷니엘처럼 세상과 혼합되지 않는 순결한 믿음으로 세워져야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통치하십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시대와 역사 앞에 쓰임 받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 통치 받는 삶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시대와 역사 앞에 쓰임 받고 싶지 않습니까?
* 본문 10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음으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리사다임을 이기니라” 이 말씀 속에서 결코 놓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을 또 발견하게 됩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충만하다하더라도, 아무리 정결한 마음을 지녔다하더라도 믿음을 믿음의 빛을 발하도록, 정결함이 정결함의 열매를 맺도록 세우는 힘과 능력은 하나님의 신이 그 위에 부어져야하고 하나님의 손이 그 위에 임하여야 합니다.
옷니엘이 구산리사다임을 이긴 비결은 옷니엘의 능력이 아니라 옷니엘에게 임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우리 의 믿음 가운데 부어지고, 하나님의 손이 우리의 삶 가운데에 임할 때에 우리는 세상 그 어떤 세력도 이기는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성도됨, 믿음의 사람의 믿음의 사람됨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옷니엘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능력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이름의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 역시도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고 “하나님은 능력이시다” 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가운데 가득하시길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