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이 천년을 하루 같이 하루를 천년같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인생이 강건하면 칠십, 팔십이라 했는데 그리고 그 인생을 풀과 같고 굴뚝에서 나와 금 새 사라지는 연기 같다고 하였는데 이 짧은 생을 사는 동안 충성이란 이름으로 흔들림 없이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쉽게 변합니다. 쉽게 잊어버립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은혜를 받았어도 세월 속으로 묻어버리고 놀랍고 풍성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시간 속으로 던져버립니다.
형제자매여러분! 오늘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할 것들을 잊고 살지는 않습니까? 진실로 오늘 우리들의 가슴엔 새기고 또 새겨야할 일들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습니까? 우리의 심장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여전히 새겨져있다면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은혜와 사랑의 시대를 살게 됩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늘 새로운 은혜로 공급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가 신실한 사람으로, 충성의 사람으로 일생동안 올곧게 헌신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충성의 댓가는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악한자의 대명사였던 구산 리사다임의 압제 하에서 고난당하던 이스라엘을 용기의 대사, 순결의 용사였던 옷니엘을 사용하셔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구원을 받아든 이스라엘은 자유자로 마음껏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힘과 능력을 기억하며 오직 그분의 뜻대로 살아야했습니다. 그러나 사십년의 세월이 지나자 이스라엘에게서는 또 다시 이방인들과 다름없는 육체대로 사는 본성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 말씀에서 ‘또’ 라는 말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반복해서 악을 행하는 민족, 거듭해서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백성입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에게 드리워진 안타까움과 슬픔은 곧 우리 스스로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 역시도 어려움과 고난 앞에서는 그렇게도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고 충성과 헌신을 다짐하지만 형편이 나아지고 시간이 지나면 언제부터인지 그 마음들이 차갑게 식습니다. 그리고 교만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아! 첫사랑을 늘 간직하고 살 수 있다면! 첫 은혜를 날마다 회복하는 영성으로 산다면! 그래서 날마다 새롭게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다면! 저는 간절히 바랍니다. 또.........그리고 또,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슬픈 우리가 아니라 더욱 새롭게........날마다 새롭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쁜 우리들의 삶이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이스라엘의 두 번째 사사인 에훗은 야곱의 12번째의 아들인 베냐민의 증손자요 게라의 아들이었습니다. 그가 속해 있던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12지파 중 가장 연약한 공동체였습니다. 게다가 그는 왼손잡이였습니다. 고대사회는 모든 것이 오른손 중심으로 이루어진 사회였습니다. 따라서 왼손잡이라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 부족함이 있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왼손잡이라는 원어 “이쉬 이테르 야드 예미노”는 바로 그런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훗은 출세와 성공을 하기에는 가문 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제약을 받는 조건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하나님의 영광의 손에 들려졌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이상, 그는 더 이상 불완전하거나 부족함이 있거나 성공에 제약을 받는 인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힘이 그의 힘이 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곧 그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은 육체의 도구가 아닌 하나님을 나타내는 영광의 도구로 쓰임 받습니다.
* 그렇다면 에훗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기에 모압과 암몬과 아말렉의 연합국에 의해 종려나무 성읍(여리고성)을 빼앗기고 모압왕 에글론에게 18년 동안 참혹한 지배를 당하는 고난의 현장에 구원자로 쓰임을 받는 빛나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우리는 본문 18절과 19절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 쓰신 첫 번째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훗이 공물 마치기를 마친 후에 공물을 메고 온 자들을 보내고 자기는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부터 돌아와서 가로되 왕이여 내가 은밀한 일을 왕에게 고하려 하나이다 왕이 명하여 종용케 하라 하매 모셔선 자들이 다 물러간지라” 이스라엘이 에훗의 인솔 하에 모압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치러 갑니다. 피땀 흘려 거둔 소중한 것들을 이방인의 왕에게 조공으로 갖다 바치는 것처럼 슬픈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자유를 빼앗긴 자의 운명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열심히 땀 흘렸으나 그 땀의 결실은 남에게 주고 오직 수고와 슬픔만이 그의 차지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그러한 일을 무려 18년 동안 줄곧 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의 삶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자유를 빼앗긴 채 헛수고하는 삶은 아닌지? 뭔가 쌓기는 하는 것 같은데 그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일에 수고하고 있지는 않은지? 진정 우리는 자유인이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 그러나 이번 조공에는 숨겨진 작전이 있었습니다. 에훗은 길이가 한 규빗, 약 45cm되는 좌우에 날선 검을 준비했습니다. 공물을 바친 후 에훗은 함께 왔던 일행들을 돌려보내고 다시 왕에게로 옵니다. “내가 은밀한 일을 왕에게 고하려고 합니다.” 하며 왕을 만나기를 청합니다. 왕은 모든 사람들을 다 물리고 에훗을 자신이 쉬고 있던 다락방으로 부릅니다. 에훗이 왕 앞으로 가까이 가며 다시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왕에게 고할 일이 있나이다." 은밀한 일, 즉 비밀정보와 하나님의 명을 받든 것을 말하려한다는 것에 에글론이 궁금증을 가지고 일어나려는 순간 숨겨두었던 에훗의 칼이 순식간에 왕의 몸에 깊이 박혔습니다. 에훗의 칼은 이스라엘의 18년의 눈물과 아픔, 고난과 수치를 절단하는 칼이 되었습니다. 에훗의 칼은 사람의 칼이 아닌 하나님의 칼이었습니다.
* 에훗의 칼은 하나님의 응징과 저주의 칼이 되어 에글론의 몸에 완전히 엉겨 붙었습니다. “칼자루도 날을 따라 들어가서 그 끝이 등 뒤까지 나갔고 그가 칼을 그 몸에서 빼어내지 아니하였음으로 기름이 칼날에 엉기었더라.”(22절)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에게 고난과 눈물과 아픔을 가져다주는 세력은 하나님의 칼이 심판을 하십니다. 그리고 사단의 권세, 세상의 세력은 이미 십자가에 의해 완전히 정복당한 채 저주아래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들인 성도는 이미 구원을 얻은 자유자입니다. 그러기에 믿음 안에서 날마다 새로운 꿈을 향해 도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마음껏 그 삶을 세워가는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현재의 삶의 모든 자리에서 다스리며, 정복하며, 충만케 하는 하나님의 복을 성취해 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세력, 사단의 그 어떤 권세도 에글론의 몸에 에훗의 칼이 완전히 엉겨 붙어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완전히 제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과연 에훗의 심장엔 무엇이 채워져 있었기에 막강한 용사들이 즐비하게 둘러서있는 에글론에게 나아갈 수 있었을까요? 여차하면 어김없이 참혹한 죽음을 면치 못할 줄 뻔히 알면서도 그의 발걸음이 적진의 심장부를 향해 나아가도록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또한 자신이 죽게 되면 가족들은 어떻게 될까? 라는 인간적인 고뇌는 어떻게 삭제시켰을까요? 온 몸이 떨리고 말문이 쉽게 열리지 않았을 텐데 에훗은 어떻게 그 마음에 품었던 뜻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었을까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손이 그와 함께 하셨음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손이 머물고 행하실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서만 역사하십니다. 아무에게나 하나님의 손이 임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빈약한 힘을 지닌 베냐민 지파의 에훗이 하나님의 사람 에훗이 되도록 한 힘, 불완전한 자로 취급받던 왼손잡이 에훗이 완전한 왼손잡이 에훗이 되었던 비결은 다름 아닌 일사각오, 죽으면 죽으리라는 정신이었습니다.
*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믿음은 차든지 덥든지 해야 합니다. 믿음에는 중간지대가 없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하는 신앙이 참 신앙인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의 일사각오의 정신은 하나님의 공의 앞에 그 삶이 사로잡힐 때 생겨나는 신앙의 능력입니다. 오늘 우리의 심장엔 주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라면, 주님의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일사각오의 정신이 심겨져있습니까? 하나님의 손은 ‘죽으면 죽으리라’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삶에서 역사합니다. 왼손잡이여도 상관이 없습니다. 절름발이여도 상관이 없습니다. 가난해도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문제는 마음에 심겨진 정신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림 받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심장은 일사각오로 충만해야합니다.
마가복음 8장 35절과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두 번째 에훗이 하나님의 손에 들림 받은 이유를 발견해 낼 수 있는 말씀은 본문 26-28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기다리는 동안에 에훗이 피하여 돌 뜨는 곳을 지나 스이라로 도망 하니라 그가 이르러서는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불매 이스라엘 자손이 산지에서 그를 따라 내려오니 에훗이 앞서가며 무리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라 여호와께서 너희 대적 모압 사람을 너희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매 무리가 에훗을 따라 내려가서 모압 맞은편 요단강 나루를 잡아 지켜 한 사람도 건너지 못하게 하였고”
* 전광석화처럼 에글론을 제거한 에훗은 다음 작전을 펼쳐갑니다. 첫 번째 작전이 성공했다는 나팔 신호가 울리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에훗을 따라 나갑니다. 그리고 요단강 나루를 완전히 장악합니다. 요단강나루는 여리고 성에 주둔하고 있던 모압 군대가 모압 땅으로 도주하는 것을 차단하고 또한 모압 본토로부터 오는 증원 군을 봉쇄하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그래서 에훗은 요단강의 핵심부를 완전히 장악하여 모압군대를 섬멸하였습니다. 결국 에훗에 의해 치밀하게 준비된 요단강의 작전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고 이 승리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80년의 태평시대를 다시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듯 에훗은 일사각오의 신앙과 함께 지혜와 총명, 모략과 재능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에훗이 에글론 왕을 죽일 작전을 세우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 어떻게 해야 모압을 이기겠습니까? 어떤 방법으로 해야 승리 하겠습니까?” 하며 하나님께 무릎 꿇지 않았을까요? “하나님! 이렇게 작전을 세웠는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고 자문을 구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에훗을 붙드셨고 그의 일사각오가 결실을 이루도록 그리고 그의 지혜와 총명, 모략과 재능이 인간의 범주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얻도록 친히 도와주신 것입니다. 사람의 것에 하나님의 것이 더해지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지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 넓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삶의 승리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육체로는 세상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육체가 하나님께 드려질 때 승리는 보장 된 것이 됩니다.
* 형제자매여러분! 지혜와 총명의 신, 재능과 모략의 신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세상을 이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지혜와 모략의 신은 하나님의 뜻을 세상 가운데서 때로는 물 흐르듯이 유연하게, 때로는 성난 파도처럼 거칠게 완성해 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위대한 승리를 이루고 싶지 않습니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올곧게 세우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풍성히 증언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지혜와 명철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의 신이 임하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