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영의 능력을 주십니다. 영의 능력이란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깨닫고 주어진 상황에 관계없이 그 뜻을 실행에 옮기는 힘을 말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에겐 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영적인 권세가 부어지게 됩니다. 영적인 권세가 입혀진 사람은 사람에게 다스림을 당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영의 능력으로 사람을 다스립니다. 남들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보며 남들이 행할 수 없는 것들을 행하는 비범함이 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권세에 기름 부음을 입은 사람들은 세상이 높아 보이거나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하찮게 보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은 단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장소로 여깁니다. 곧 사명의 자리입니다. 영적인 권세가 임한 곳은 세상의 세력들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그 자리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자유가 세워집니다. 영적인 권세가 임한 곳은 아픔과 눈물과 고통은 사라지고 치유와 기쁨 그리고 소망이 솟아오릅니다. 오늘 우리는 영의 권세에 기름부음을 받아 쓰임 받는 한 인물을 만나러 가겠습니다.
* ‘죽으면 죽으리라’ 일사각오의 하나님의 사람, 에훗이 죽자 이스라엘은 또 다시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행을 일삼았습니다. ‘하나님의 목전에 악’ 이란 세상과의 혼합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세상과 혼합된 삶을 살자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가나안 왕 야빈에게 그들은 넘겨주었습니다. 가나안 왕 야빈에게는 구백 대의 전차와 당신 최고의 전사라 불리던 시스라가 있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전차 구백 대가 더 커보였던 이스라엘은 그 위력에 눌려 무려 20년 동안 죽은 시체처럼 살았습니다.
본문 3절의 “심히 학대한 고로”의 원어는 ‘라하츠’ 인데 그 의미는 ‘틀어 짜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야빈의 탄압이 매우 혹독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과 혼합된 삶은 결국 세상으로부터 틀어 짬을 당하는 괴로운 인생, 신음하는 인생이 될 수밖에는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8절에서 말씀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 이스라엘이 철 병거 구백 대를 지닌 야빈보다 하나님이 크고 높게 보였다면 그리고 자신들이 그 크고 높으신 하나님께 택함 받았다는 자존감이 살아있었다면 그들은 결코 이십년 동안 무릎 꿇은 채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무릎을 꿇지 않는 영에 통치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이 높아 보이고 커 보이는 사람은 세상 앞에 무릎 끓은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흔들리고 유행에 따라 삶의 가치관이 바뀝니다. 환경에 따라 처세술이 달라지고 지위에 따라 성격도 바뀝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하나님께 예정함을 입고 택함을 받은 우리성도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가장 높고 큰 곳에 모셔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들의 무릎은 곧게 세워져있을 것입니다. 시대에 휩쓸리거나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시대와 환경을 이끌어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높은 곳에 모시고 살기에 하나님나라에 합당한 성품과 인격을 겸비하며 그 삶으로 오직 하나님만 높여드리게 될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가장 커 보이는 영의 눈으로 확장되는 우리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 이스라엘은 이렇게 틀어 짬을 당하는 20년의 세월을 보내고서야 하나님을 다시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구원자로 쓰임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였습니다. 과연 드보라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민족의 구원자로 쓰임을 받았을 까요? 오늘 본문에는 그 이유가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의 행적을 통하여 그녀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발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본문4-5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 거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그렇습니다. 드보라는 이스라엘의 고난이 한창이던 중 예언자의 일을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손에 들려져 백성들을 규례와 율법에 따라 재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백성들 사이에서 재판하는 드보라! 그것도 여성은 사회적 진출은 결코 할 수 없는 시대였는데 그녀가 어찌하여 남자들을 제치고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사람, 권면하는 사람, 길을 안내하는 사람, 사사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을까요? 죽고 사라진지가 이미 수천 년이 된 드보라가 어찌하여 인류의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오르내리는 것일까요? 과연 그녀의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 둘째로 본문 6-7절의 말씀입니다. “드보라가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지 아니하셨느냐 이르시기를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일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하셨느니라” 드보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녀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을 이십년간이나 쥐어짜고 있는 야빈과 그의 군대장관 시스라와 그들이 철저하게 신뢰하고 의지했던 철 병거 구백승과 그의 군사들을 전멸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지휘자로 세워 납달리와 스불론 지파의 사람들 일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에 진을 치라는 것이었습니다. 다볼 산에 진을 치라 명하신 이유는 야빈의 전차의 공격을 피하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다볼 산은 높이가 553m의 높은 산이었기 때문에 전차가 쉽게 오를 수 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이스라엘이 다볼 산에 진을 치자 야빈의 군대는 기손 강에 진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손 강은 겨울이면 물이 범람하여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곧 그들은 자신들이 죽을 무덤의 자리에 진을 친 것입니다. 이 전쟁의 결과가 본문 15-1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바락의 앞에서 시스라와 그 모든 병거와 그 온 군대를 칼날로 쳐서 패하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도보로 도망한지라. 바락이 그 병거들과 군대를 추격하여 이방 하로셋에 이르니 시스라의 온 군대가 다 칼에 엎드러졌고 남은 자가 없었더라.” 완전하고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한 나라이든지, 한 개인이든지 개입하시면 그곳은 완전하고 완벽한 승리가 보장된 곳이 됩니다. 돕는 손길을 보내시든지, 제도를 바꾸시던지, 상대편이 제 꾀에 넘어지든지 혹은 오늘본문의 전투에서처럼 자연의 재해를 이용하셔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승리하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 실제로 야빈의 막강군대가 완전히 섬멸된 요인은 하나님께서 기손 강에 천둥번개 폭풍우를 정신없이 쏟아 부으셨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5장 4-5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들에서 부터 진행 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도 새어서 구름이 물을 내었나이다.” 갑작스런 천둥번개에 폭풍우로 인하여 강이 범람하고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쓸려 내려가고 전차가 곤두박질치자 야빈의 군대는 어쩔 줄을 모릅니다. 바로 그때에 바락이 쏜살같이 달려가서 야빈의 군대를 완전히 섬멸해 버린 것입니다. 이 싸움으로 20년 동안 채워져 있던 이스라엘의 고난과 눈물의 착고는 완전히 풀어졌습니다.
형제자매여러분! 삶의 언저리에 채워진 모든 착고는 하나님만이 풀어주십니다. 눈물의 착고로 부터, 아픔의 착고로 부터, 고난의 착고로 부터, 실패의 착고로부터의 자유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로만 가능합니다.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사61:1-2)
* 그렇습니다. 세상의 군대, 사단의 권세는 하나님의 군대, 하나님의 권세를 결코 넘어설 수 없습니다. 전차 구백 승이 아니라 구천 승, 구만 승을 가졌다고 하여도 그들의 운명은 패배입니다. 기손 강이라는 하나님의 건너편 세상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는 다볼 산에 진을 친 승리의 사람들이며 세상은 기손 강에 진을 친 패배의 세력들입니다. 우리는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길 원합니다. 단 한번 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인생에서 성공하길 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말씀이 임재한 곳, 다볼 산으로 끊임없이 올라가야 합니다.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께로 올라가야 합니다. 끊임없이 십자가로 나아갈 때 우리는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도 이기며 거둘 수 없었던 열매도 거두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드보라는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을 수행하는 선지자였고 사람들을 격려하고 세워서 하나님의 승리의 영광을 보게 하는 능력자였습니다. 과연 그녀가 하나님의 손에 들림 받은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 셋째로 드보라는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는 찬양의 사람이었습니다. 사사기 5장 3절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너희 왕들아 들으라 방백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사사기 5장 전체가 가능성 없는 전쟁에서 승리케 하시고 자유와 해방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드보라의 영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과연 드보라의 영혼은 어떠하기에 이토록 순결하고 보배로운 찬양으로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과연 재판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실천하며 사람들을 세워가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 드보라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드보라의 시대에는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인권을 결코 생각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무시당하고 천히 여기며 험한 일을 당연히 하던 시대였습니다. 오직 남성중심의 사회였습니다. 그런 그녀가 모든 남성들을 뒤로하고 해가 힘 있게 솟아오름같이 하나님의 구원의 대사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 비결을 밝혀봅니다.
* 출애굽기 18장에 보면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백성을 재판하느라고 하루 종일 진땀을 흘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백성들도 자기의 차례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로가 지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이드로가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을 합니다. “그대와 함께한 이 백성이 필연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그대에게 너무 중함이라. 그대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출18:18) 그러면서 백성을 재판할 천부장과 백부장,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자격기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언합니다. “그대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재덕이 겸전한 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를 빼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그들로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출18:21-22)
* 이 말씀에 따르면 재판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인품이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요, 진실한 자요, 불의한 이익을 싫어하는 사람이며,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물며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제시한 사람의 기준도 이러한데 시대와 역사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사람을 세우실 때의 기준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사사 즉 재판하는 사람으로 세움을 입은 드보라는 이러한 기준을 훨씬 뛰어넘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의 기준을 훨씬 뛰어넘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그 사람은 곧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는 믿음과 영성을 지닌 사람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익, 곧 탐욕에 휘두르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모든 시대와 역사 앞에 쓰임 받을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합니까? 사람의 사람 드보라가 하나님의 사람드보라가 된 비결 그것은 오직 하나님 사랑이었습니다.
* 오직하나님사랑으로 충만했던 드보라의 노래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여 주의 대적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는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하니라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태평하였더라”(삿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