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드온의 또 다른 이름은 여룹바알입니다. 그 뜻은 “바알은 싸울지어다.”라는 의미로 “바알은 결코 신이 아니다.” 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그러기에 넌 큰 용사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와 함께 하신다. 그러기에 네가 미디안 사람치기를 한 사람 치듯 하여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겠다.”는 약속의 말씀이 기드온에게 임했습니다. 가문도 보잘 것 없었고 그 자신도 내세울만한 것이 없었던 기드온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약속이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큰 용사가 될 수 있겠어? 내가 어찌 막강거인 미디안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겠어. 과연 내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약속과 인간적인 생각 사이에서 완전한 확신을 갖지 못한 기드온이 표징을 구합니다.
* 사사기 6장 17-18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이 구하는 표징이었던 예물을 가져 오기까지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드온이 최고의 정성으로 마련한 반석위에 올려놓은 제물들이었던 고기와 무교전병을 손에 잡고 있던 지팡이로 반석에서 불이 나오게 하여 제물을 불태우는 신비한 일까지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자 기드온은 그제야 이제까지 자신에게 말씀해 주시고 약속하신 분의 실체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체험한 기드온은 결국 큰 용사로 선포해 주신 길로 나아갑니다. 그가 큰 용사로써, 민족의 구원자로 쓰임 받는 첫 번째의 사명은 본문25-26절에 말씀하신 것처럼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서 번제의 땔감으로 쓰는 것이었습니다.
* 바알과 아세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가나안 사람들이 숭배하던 우상이었습니다. 바알은 주 또는 소유자라는 뜻으로 우뢰의 신, 비의 신, 풍요의 신으로 여겨졌고 아세라는 다산과 풍요의 신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바알과 아세라는 사람들을 미혹케 하고 어리석게 하며 음란하게 하는 미신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상숭배를 철저히 금지 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단을 헐어 버리고 깨뜨리고 찍어 버리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34장 13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는 도리어 그들의 단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을 지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러한 엄위한 명령들을 거역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섞여서 우상 숭배를 일삼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미디안을 무너뜨리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의 심령 안에 잘못 세워져 있던 것들을 무너뜨리고 찍어버리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습니다. 그들 안에 세워져 있던 하나님 외의 것이 무너져야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릇은 비워져야 채워지고, 인생은 죄 사함을 받아야 의인으로 거듭나며, 진리는 거짓이 무너졌을 때 세워지는 것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모든 사람이 성공을 추구하고 복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 성공과 참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참 성공과 복을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이 아닌 받을 만한 사람, 즉 그 성공과 복을 육체를 위하여 쓰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할 거듭난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거듭남이란? 내 안에 하나님보다 높이 세워진 것을 허무는 것을 말합니다. 거듭남이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 삶을 말합니다.
디모데 전서 3장 5절에서 말씀합니다.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 보리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이 시대와 역사의 부름을 받아 큰 용사로 쓰임 받는 과정 속에서 제일 먼저 행하게 하신 것은 자신의 가정, 자신의 지역에 그릇 세워진 헛된 것들을 허무는 것이었습니다.
*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삶, 우리들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혹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복을 담을 만한 그릇이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그저 복을 갈망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내 자신, 그리고 내 가정을 온전한 믿음의 가정으로 가르치고 양육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큰일을 하겠다고, 하나님의 큰 용사가 되겠다고, 시대와 역사 앞에 쓰임 받는 삶을 살겠다고 나서지는 않았습니까? 거듭 태어나는 삶은 일생동안 몸부림치며 싸워야할 우리들의 영적 전쟁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믿음으로 가정을 세우며 하나님보다 더 높이 세워진 것들을 무너뜨리는 일 역시도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들이 성취해야 할 사명입니다.
* 하나님께서 ‘헐어 버리라’는 바알의 단과 ‘찍어서 번제로 쓸 나무로 사용하라’는 아세라 상이 있던 곳은 기드온의 아버지 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을 받은 기드온은 이 일로 인하여 아버지와 몹시 불편한 관계, 아니 어쩌면 원수지간이 될 지도 모르는 일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가족뿐만 아니라 성읍 사람들 전체가 바알과 아세라를 끔찍하게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더 이상 사람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인간의 정, 육체의 관계에 굴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결국 기드온은 열 명의 종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서 번제의 땔감으로 사용하였습니다.(28절) 비록 아버지와 일가친척 그리고 성읍 사람들이 두려워 낮에 행하지는 못하고 밤에 행하였지만 명하신 그대로 하였습니다.
*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삶의 주변을 돌아보겠습니다. 혹,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 깨달은 진리, 심령에 부딪친 말씀이 있음에도 혹 인간적인 정 때문에, 사람간의 관계가 깨질 것이 염려되어 주저하거나 양보하거나 미루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참 곤란하네. 기회 봐서 하지 뭐! 어쩔 수 없잖아. 하나님도 이해하실거야!” 하나님의 뜻을 실행에 옮기는 삶, 말씀하신 바를 실천에 옮기는 믿음, 깨달은 바를 행하는 신앙이 어렵기는 하지만 결국은 모든 것을 선하게 아름답게 복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사사로운 감정이나 현실적인 이익, 인간의 관계 때문에 꺾어 버리면 결국은 모든 것을 더 어렵게 더 꼬이게 그리고 더욱 고난 받게 합니다.
만일, 기드온이 아버지와 친척들과의 관계, 그리고 성읍 사람들에게 당할 보복이 두려워서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기드온 개인 뿐 아니라 가족과 성읍 그리고 민족 앞에 더 큰 고난을 입히고 역사 앞에는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다”(딤후2:4)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군사인 우리는 사사로운 감정에 매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군사 된 우리는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케 하기 위하여 더욱 그리스도로 충만하여야 합니다.
* 기드온이 바알의 단과 아세라 상을 찍은 다음 날, 성읍 사람들이 아침 일찍 바알의 단이 무너져있고 아세라 상이 찍혀 번제를 드렸던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은 한마디로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제는 바알과 아세라의 저주만 남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길로 ‘누가 범인인지 색출하여 죽여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범인을 죽여야만 바알과 아세라가 화가 풀어져서 자신들이 저주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읍 사람들은 기드온이 범인인 것을 알고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에게 몰려들었습니다.
*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그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가나안에 정착하며 살게 된 이스라엘 백성이 어찌 이렇게 까지 타락할 수 있었을까? 도대체 이스라엘에게서의 하나님은 누구인가? 그들은 어떻게 하여 하나님보다 바알과 아세라를 더 신뢰하는 지경에 까지 떨어지게 되었을까? 과연 그들은 한 번에 타락의 자리에 떨어졌을까?’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둑이 한 번에 무너지지 않는 것처럼 타락도 결코 한 번에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자신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아주 서서히 그리고 아주 작은 것부터 하나 둘, 무너지고 타협하면서부터 타락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삶 전체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지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내 안에 허락해 놓은 세상을 향한 미세한 틈새를 조심해야 합니다. “괜찮겠지? 이 정도면 문제없을 거야. 다들 이러고 살잖아. 이정도의 유연성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하나님 주시는 생각이 아니라 사단이 뿌려놓는 생각입니다. 세상을 향해 열어놓은 틈새를 주저함 없이 막아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것이 심령 안에 차오르게 되고 심령 안에 채워진 하나님의 것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힘으로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은 사단인데 사단이 사단과 싸우겠습니까? 세상을 이기는 힘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를 찾아온 성읍 사람들은 ‘기드온을 끌어내라.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며 언성을 높이면서 거칠게 달려들었습니다. 바로 그때 요아스가 말합니다. 본문 31절입니다.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쟁론하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쟁론하는 자는 이 아침에 죽음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 단을 훼파하였은즉 스스로 쟁론할 것이니라.” 요아스의 이 말은 ‘어찌 바알이 신이 될 수 있겠느냐? 만일 바알이 신이라면 너희들이 나서지 않아도 그가 스스로 일어나서 기드온과 싸울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다’ 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저는 이 장면 앞에서도 궁금증이 일어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바알과 아세라에게 제사를 하던 요아스였는데......., 또한 바알의 단과 아세라 상이 자신의 집에 세워진 것으로 은근히 자랑삼았는데 어찌 이 한순간에 그가 하나님의 의인으로 돌변할 수 있었을까?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성읍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이렇게 뛰어난 지혜의 말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스스로 쟁론할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시고 그를 통하여 영광스런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길 원하셨던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버지 요아스의 마음도 일순간에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마른 막대기로도 능력을 펼치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돌멩이로도 한 민족을 이루실 하나님! 무에서 유로 창조하시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순간에 변화시켜 역사 앞에 세우는 일이 무슨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감동하시면 사람의 변화됨의 역사, 삶의 역전의 은혜는 일어나고야 마는 것입니다.
* “바알이 더불어 쟁론할 것이라. 바알이 진짜 신이라면 그가 살아서 기드온과 맞붙어서 싸울 것이라.”는 뜻을 가진 여룹바알은 기드온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입고 임마누엘의 영광스런 은혜를 입어 이 땅에서 큰 용사로, 사명자로 부름 받은 우리들의 이름도 마땅히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는 육체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으로 육체의 일들을 도모하며 살다가 허무하게 흙으로 돌아가 버릴 수 없습니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삶의 굴레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끊어버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영원하고 완전한 제사가 되어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죄악과 불의와 불법과 저주와 죽음을 소멸시켜 버렸습니다.(엡2:16)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함께하심의 약속, 임마누엘을 믿는 믿음의 경주입니다. 믿음으로 바알이라는 세상의 욕심과 탐욕을 헐어버리고, 믿음으로 아세라라는 사단의 유혹과 속임수를 찍어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삶으로 예배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던 기드온을 그곳에서 불러내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또한 우리를 저 죄악의 자리에서 불러 세우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구경꾼이 아니라 싸움꾼, 큰 용사가 되라하심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사람! 그 사람의 이름은 여룹바알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이 사단과 세상과 거침없이 싸워서 얻어야할 이름도 여룹바알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