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과정을 기록한 본문을 통하여 세 가지의 주제를 놓고 말씀을 증언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본문1절에서 말씀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우리들의 삶에서 최고의 문제는 사랑입니다. 아무리 성공하고, 아무리 지식이 많고, 아무리 높아졌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13:2) 그러나 사랑을 깨닫고 사랑하며 살면 그는 최고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4:12)
*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실 때가 이른 줄 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죽음은 처절한 고난 뒤에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절한 고난이란 태형을 말하는데 태형은 보통 쇠구슬이 박혀있는 39개의 가닥으로 이루어진 채찍으로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채찍으로 때리면 구슬들 때문에 깊은 상처가 나고 채찍질을 계속하면 그 상처 난 곳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또 채찍에는 날카로운 뼛조각들이 박혀있기 때문에 채찍질을 하면 살이 심하게 찢겨져 나갑니다. 그리고 찢겨진 살은 피범벅이 된 채로 매달려 있게 됩니다. 정맥은 밖으로 드러나고 근육 및 창자의 일부가 노출되어서 십자가에 달리기도 전에 죽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을 저주의 죽음으로 불렀고 가장 고통스런 죽음이었고 말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셨지만 동시에 사람의 몸을 입은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그래서 뜻하시면 무엇에든 전지전능으로 역사하셨지만 동시에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 어떤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육체의 약함을 동일하게 지니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26:39) 라고 간절히 탄원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우리가 주님과 같은 이러한 참혹한 죽음 앞에 놓인다면 어떨까요? 누구를 돌보고 염려할 겨를이 없습니다. 두려워 떨뿐 아니라 온통 자신의 문제에만 매달리느라 정신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 내가 곧 참혹한 죽음을 당할 텐데 나에게 관심을 좀 가져봐라. 내가 이 죽음 앞에 서있는데 너희들은 무엇 하는 것이냐?’ 하며 오히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힘들게 할 것입니다. 병중에 있는 사람이거나 수술을 앞둔 사람들의 예민해진 심정과 태도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와중에서도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 즉,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는 자신을 걱정하기보다 세상이라는 위험하고 외롭고 고단한 광야에서 싸울 제자들을 더욱 걱정하신 때문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처절한 고난과 비참한 죽음 앞에서도 굴절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 놀라운 사랑이 오늘도 저와 여러분가운데, 믿음의 사람들 심령에 강수가 되어 흐르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이 험난한 세상을 살고있는 힘은 무엇입니까? 돈의 힘도 아니요, 지식의 힘도 아니요, 남편이나 자식 때문도 아닌 오직 주님의 사랑 때문 아닙니까?
*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여러분과 저의 인생 여정 앞에 홍해처럼 가로막고 가시처럼 찌르며 태산같이 쌓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하신 말씀을 가슴에 새기십시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생각하시고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무한 사랑으로 우리의 걸음걸음을 함께 하고 계십니다. 처절한 죽음을 앞두고서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아니하시고 사랑을 극대화 하신 주님이시라면 사망을 이기시고 영광가운데 계신 오늘 우리를 향한 사랑은 어떠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무궁 영원불변하십니다. 예레미야 31장 3절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여러분! 하나님의 이 사랑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사랑이 되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의 힘과 능력이 여러분의 영혼을 지배하도록 맡기십시오. 세상을 넉넉히 이기게 될 것입니다.
* 두 번째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입니다. 본문 3절에서 말씀합니다.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외 되는 사람이 결코 없습니다. 물론 보이는 이 몸이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진짜 사람인 속사람이 그분께로 돌아갑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날 것을 결코 계획한 적이 없습니다. 자신은 계획하지 않았지만 하늘 아래 어떤 나라, 어떤 부모,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계획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한 걸음 두 걸음씩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9)
* 여러분!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삶을 잘 못 살면 죽은 삶이 되고 삶을 잘 살면 죽어도 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잘 먹고, 잘 입고, 잘 마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죽기 위해 삶을 잘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 영원히 살기위해 죽는 죽음은 기쁨과 행복의 축제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의 죽음은 슬퍼하거나 절망적인 일이 아닌 영원한 행복과 즐거움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축제의 날입니다.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14:13)
* 하나님의 오른손에 붙들려 시대와 역사 앞에 쓰임 받았던 존 웨슬리목사님이 거듭나기 전에 한 배안에서 생활했던 모라비안 교도들의 신앙을 보고서 도전받은 간증입니다. “나는 7시가 되어 모라비안 교도들의 집회에 참석했다. 이 사람들은 내가 오랫동안 관찰해 보았지만 그들의 생활 속에 남달리 깊은 경건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들은 겸손했다. 그들의 이와 같은 꾸준한 겸손의 미덕은 배에 탄 다른 손님들을 위한 천한 잡무를 솔선해서 무보수로 맡아 하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었다.
영국인들은 이런 일은 손끝도 까딱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아무 보수 없이 남의 천한 일을 해주느냐고 물었더니 '저들의 교만한 마음에 좋은 참고가 되겠지요. 사랑하는 주님은 그들을 위해 이보다 더한 일도 하셨는데요.'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들은 온유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짜증을 내고 분통을 터뜨리고 성을 낼 일도 많았는데도 그들은 언제나 온유했다. 남들이 그들을 떠밀고 구타하고 넘어뜨려도 그들은 대항하지 않고 묵묵히 쓰러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자기 일을 하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입에서 불평과 불만이라고는 조금도 들어볼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의 집회에 참석하고 나서 또 한 가지 사실을 더 발견했다. 그들은 두려움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뻐기지도 않고, 허세를 부리지도 않고, 혈기를 부리지도 않고, 악하게 대항하는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무서워하는 마음조차도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집회를 시작하려고 찬송을 부를 때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배 위를 덮쳤다. 배의 제일 큰 돛이 산산조각이 났다. 배는 눈 깜짝할 사이에 물바다가 되고 물은 갑판 위로 노도같이 밀려들었다. 깊은 흑암은 이미 우리를 삼켜 버린 듯 했다. 영국인들 선실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그러나 모라비안 교도들은 조용히 찬송을 계속 부르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 후에 한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무섭지 않습니까?' '하나도 무섭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죠.' '그러나 부인들이나 어린이들은 무서울 것이 아니겠어요?' '아닙니다. 우린 비록 연약한 아녀자라도 죽는 것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 여러분! 죽음 곧 종말은 시간이 아니라 삶입니다. 물론 종말은 시간과 함께 이르지만 종말을 이미 준비한 삶을 살고 있다면 종말의 시간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닙니다. 아침이 이르러 정오를 지나면 곧 밤이 오듯이 종말은 어김없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거부할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습니다. 떠오르는 해를 막을수가 있습니까? 지는 해를 붙잡을수 있나요? 결국 종말은 수용하는 마음, 준비된 삶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그 하나님의 나라, 영생의 나라로 갈 수 있는 삶을 준비하며 살고 있습니까?
* 오늘 세 번째의 주제는 ‘순종’에 대한 문제입니다. 본문 8 절의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 라는 믿음의 고백을 드렸던 베드로가 난감해 졌습니다. 자신의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당시 하인들의 일이었던 발 씻기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눈엔 예수님의 그러한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나서서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려도 부족했는데 예수님께서 오히려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셨으니까 말이죠. 난감, 황당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며 주님의 섬김을 거부합니다. “주여! 주께서 정말 제 발을 씻기실 작정이십니까? 이건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주님의 발을 씻겨 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시오, 우리의 선생님이신 주님께서 어찌 우리의 발을 씻기신다는 말씀입니까? 세상에 이런 일은 없습니다. 제 발은 절대 씻기지 못하십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태도는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상식과 기준에 합당한 태도였습니다. 스승에 대한 공경, 주님께 대한 겸손한 태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놓쳤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가려진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적인 상식과 기준,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베드로는 순종했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었고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자 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 순종으로 받아들여야할 일에 자신을 내세우면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역행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베드로의 행위는 사실 그리스도를 높여 드리려한 것이었지만 결국은 그것이 불순종이 되었습니다. 본문 7절입니다.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너의 이성과 기준으로 그리고 너의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일지라도 순종하라 하십니다. 순종하면 나중에 그 뜻을 알게 되리라 권면하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의 신앙의 여정은 사실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라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은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행하시고자 하시는 모든 일에 아멘하며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에도 겸손히 순종하고 받아들일 수없는 일에도 순종으로 나아가는 우리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