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섬김의 사역은 천지창조이래로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햇빛과 비를 주셔서 모든 곡식과 과일들이 풍성히 자라게 하심으로 그것들로 사람을 살찌우십니다.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시고 반석에서 샘물을 터뜨리셔서 광야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을 먹이신 것과 같습니다.
맑고 신선한 공기를 끊임없이 불어 넣어주셔서 모든 생명이 자유롭게 숨 쉬며 살아가게 하십니다. 만일 공기를 마시는 것도 물 값이나 전기료를 지불하는 것처럼 한다면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요? 공기를 마실 때도 빈부차이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산소를 많이 마셔서 오래살고 돈이 없는 사람은 산소를 마시지 못하여 곧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해로 낮을 주관케 하셔서 사람도 동식물도 각자의 역할에 따라 활동하게 하시고 달과 별로 밤을 주관케 하셔서 모든 생명으로 쉼을 얻게 하십니다.
* 시편 65편 8-13절의 말씀입니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주의 은택으로 년사에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초장에는 양떼가 입혔고 골짜기에는 곡식이 덮였으매 저희가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참 아름다운 표현이죠?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섬세하시고 아름다운 섬김을 노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섬김의 사역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고 그 모든 사역마다 오묘하고 섬세하고 흠이 없으십니다. 어느 것 하나 풍성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섬김의 극치는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완전히 쪼개어 생명의 떡으로 우리 영혼에 먹이시고 생명의 음료로 우리 심령에 흐르게 하신 것입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 지난 주 화요일(2012년 11월 6일) 전도 사역을 마치고 집으로 가려는 길이었습니다. 잘 알고 지내는 할아버지가 쓰러져 있는 것입니다. 마침 사역을 도우러왔던 현지인 교회의 신학생인 Rolan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어찌된 일이야?’ 물으니 ‘나도 정확히 본 것은 아닌데 저 할아버지가 일어나다가 갑자기 쓰러졌다고 합니다.’ 라고 대답하면서 구급대에 이미 연락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어찌된 일인가 하고 몰려들자 경찰들이 제지하며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저는 그 할아버지의 옆으로 다가가 이리 저리 살펴보았습니다. 숨은 가늘게 줄어들기 시작했고 곧 멎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어쩌다가 한두 번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눈은 떠져있었지만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얼굴의 혈색은 점점 어두운 색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목에 손을 대어 짚어 보았습니다. 전혀 맥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눈을 감겨드렸습니다. 숨이 완전히 거두어졌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분을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분의 생명을 지금 거두셨다면 이제 이 영혼이 안식할 처소를 마련해 주십시오. 주님의 나라에서 평안히 쉬게 해 주십시오.” 기도를 한 후 한참 만에 구급대가 왔습니다. 처음 전화를 하고 약 30분이 지나서였고, 제가 기도한 후 약 10분이 지나서였습니다. 구급대원들은 오자마자 일사분란하게 자신들의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숨을 쉬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한 사람은 가슴을 압박하며 인공호흡을 합니다. 땀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반복합니다. 또 한 사람은 입을 열어 공기 파이프를 집어넣고는 산소를 주입합니다. 마치 깊은 샘물에서 물을 퍼 올리는 것처럼 이미 멎어 버린 숨을 끌어올리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또 한 사람은 약품 상자를 열더니 그곳에서 몇 개의 주사약을 꺼내어 링거에 주입합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맥박의 박동 수를 체크하는 기계를 관찰하며 이렇게 저렇게 지시를 합니다. 그곳은 한 생명을 살리려는 열정으로 가득한 곳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5분이 지났는데도 멎었던 숨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구급대원들은 멈추지 않습니다. ‘살아나겠나?’ 했는데 약 8분 정도가 지나자 산소 주입을 하던 공기 주머니가 아주 조금씩 자발적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3분 정도가 지나자 드디어 가슴에서 숨이 쉬어지는 것이 보일 정도가 되었습니다. 숨이 완전히 멎어서 주검이 된 줄 알았는데 그 필사적인 노력으로 인해서 할아버지의 숨은 다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한 구급대원에게 물었습니다. ‘이제 정상적으로 숨이 돌아온 것입니까?’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원칙적으로는 숨이 돌아왔습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숨이 멎었던 한 생명을 다시 살리려는 구급대원들의 그 필사적인 모습을 보면서 죄와 허물로 숨이 끊어졌던(엡2:1) 우리사람들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십자가 죽음, 그 필사적인 구원 작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의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진노아래 놓여있었으나 지금은 은혜가운데 있고, 절망가운데 있었으나 지금은 소망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숨결 속에는 하나님의 필사적인 사랑의 수고가 담겨져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생명 속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거대한 섬김의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명의 가치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결코 되는대로 살수도 없고 함부로 살아서도 안 됩니다.
*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과 섬김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와 같은 사랑과 섬김에 대한 우리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풀은 꽃과 향기로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과목은 풍성한 결실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그 은혜를 찬양합니다. 곡식은 탐스러운 알곡으로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증거하고 새는 하늘에서 물고기는 물속에서 짐승은 초장에서 하나님의 섬김을 힘써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은 그 놀랍고 경이로운 극치의 섬김을 받으면서도 감사는커녕 불평과 탄식을 일삼습니다. 더 큰 만족을 얻겠다고 욕심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조금 더 배부르게 살겠다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의 겉옷까지도 빼앗습니다. 자신의 이익에 반하면 겸손한 사람, 선을 행하는 사람도 악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과연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요?
* 두 주전에(2012년 10월 30일)전도 사역을 마치고 기도를 하고 뒤를 돌아보니 제 집사람이 몇몇 사람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가까이 갔더니 그들 중 한 사람이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물론 다른 분들도 미소가 가득하더군요. ‘안녕하세요. 목사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리는 미국의 오하이오에서 왔습니다. 아까 우리가 이곳을 지나면서 목사님의 찬양 하는 것을 보았는데 놀라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음이 울려 퍼지는 것을 보고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전도 사역을 마치고 양식을 나누는 것을 조금 전에 또 보니 우리가 그냥 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우리도 오하이오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에서 선교사역을 마치고 이제 내일 미국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헝가리 포린트가 조금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만포린트와 동전을 제 손에 가득 쥐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있던 다른 동료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 옆에 있던 다른 성도는 열 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는데 이번 선교사역에는 두 명의 자녀를 데리고 왔다면서 그 옆에 함께 있던 예쁜 아가씨들을 소개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선교 갈 때마다 열 명의 자녀들을 돌아가면서 데리고 다닌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삶은 자신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고, 생명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기위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내어 선교도 다니고 물질을 모아 이웃을 섬기고 그리고 자녀들을 대동하여 가장 큰 유산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과 섬김의 신앙 말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그리스도의 섬김에 대해서 얼마나 깨닫고 있습니까? 그분의 사랑을 발견했다면 우리의 삶은 사랑으로 풍성해져야하고 그분의 섬김을 깨달았다면 우리의 삶은 섬김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양손을 주신 이유는 뒤 짐 지고서 다른 사람들이 잘하나 못하나 감독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두 손으로 아픈 사람들은 감싸주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은 닦아주고, 배고픈 사람들은 먹여주고, 헐벗은 사람들은 입혀 주라고 두 손을 주신 것입니다. 내가 입는 옷이 고급 옷이라 하여 누더기 옷을 입은 사람들을 하찮게 여기는 태도, ‘내가 누군 줄 알고 가까이 하려는 거야?’ 내가 조금 배웠다 하여 배우지 못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려는 태도, ‘내가 저런 무식한 사람들과는 어울릴 수 없지. 그러면 내 수준이 어떻게 되겠어?’ 또한 내가 사회적 신분이 높은 위치에 있다하여 교회에서 허리를 숙이지 않으려는 태도, ‘내가 이런 일을 어떻게 해? 교회에 나오는 것이 고작 이런 보잘 것 없는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잖아.’
여러분! 우리성도의 가슴은 뜨거워야 하고 손은 부지런해야 합니다. 마음은 겸손해야하고 허리는 늘 숙여져 있어야 합니다. 오늘 나의 생명은 하나님의 ‘십자가 죽음의 섬김’에 의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실제는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섬김의 실제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의 실제는 무엇일까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하였는데 행함이란 그리스도의 섬김을 나의 삶으로 풀어내는 것입니다. 섬기지 않으면 행함이 없기 때문에 믿음이 죽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참치가 평상시에는 시속 30-40km로 달리며 최고 속도를 낼 때는 시속 130km로 달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참치는 잠을 잘 때도 계속 달려야하는데 그 이유는 일반 물고기는 가만히 있으면서 아가미를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바닷물에 녹아있는 산소를 흡수할 수 있지만, 참치에게는 그런 근육이 없기 때문에 움직여야만 산소를 흡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치에게서의 멈춘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가 사랑과 섬김을 멈추면 그는 영적으로 죽어갑니다. 생명력이 넘치는 믿음이 되려면, 영적으로 균형을 갖춘 삶을 살려면 끊임없이 배운 바를 삶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엘서 2장 26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기이히 대접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오늘도 우리는 끊임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넘치는 섬김의 은혜를 받고 삽니다. 우리는 인생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풍요로우신 그 사랑과 섬김을 마음껏 먹고 풍성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이한 대접을 받은 만큼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삶을 다하여 찬송해야 합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과 섬김은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찬송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