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란츠슈베르트는 1797년 오스트리아 비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었고 슈베르트는 그의 13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음악을 좋아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5살부터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했는데 다른 사람보다 탁월한 재능을 나타냈습니다. 슈베르트를 일컬어 ‘가곡의 왕’이라 부릅니다. 그 이유는 ‘겨울 나그네’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소녀’ 등 650여 편의 뛰어난 가곡들을 작곡하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곡들이 한 결 같이 아름다운 선율과 화성의 미묘한 변화 등을 탁월하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밖에도 그는 관현악곡, 교회음악, 실내악, 피아노곡 등, 1200여곡을 작곡하면서 음악가의 최고봉의 반열에 섰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31살의 나이에 알 수 없는 병으로 인하여 삶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교향곡 중에 8번 교향곡이 있습니다. 그 교향곡을 일컬어 ‘미완성 교향곡’이라고 합니다. 이곡은 슈베르트가 25세 때에 작곡을 하였는데 그의 생전에는 연주되지 못했습니다. 그가 죽은 뒤 무려 37년 만에 우연히 발견되어 초연된 이래로 오늘까지 극찬을 받고 있는 곡입니다. 이 곡을 ‘미완성 교향곡’이라 부르는 이유는 보통의 교향곡은 4악장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이곡은 2악장으로만 이루어 졌기 때문입니다. 반 정도 완성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향곡은 그 어떤 완성된 교향곡보다도 아름답고 감동적이라는 찬사를 받습니다. 브람스는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를 하였습니다.
“이곡의 형식은 분명하게 미완성된 곡이지만 내용적으로는 결코 미완성이 아닙니다. 이 두 개의 악장은 어느 것이나 내용이 충실하며 그 아름다운 선율은 사람의 마음을 끝없는 사랑으로 휘어잡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라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처럼 온화하고 친근한 사랑의 말로써 다정히 속삭이는 매력을 지닌 교향곡을 나는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미완성 된 것도 완성된 것 이상으로 아름답고 멋있습니다. 문제는 완성되었다고 하나 누구로부터 무엇을 위하여 완성된 것인가? 미완성 되었다고 하나 그 삶이 누구에게 속하여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육체의 것들을 위하여 완성된 것이라면 그것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미완성되었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가고 있다면 그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최고입니다.
*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2012년의 첫날을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두주정도만 지나면 또 다른 새해를 맞이하는 지점에 우리 모두 서 있습니다. 세월이 참 빠릅니다. 얼마나 빠른지 베틀의 북보다 빠르고 한 호흡 같이 빠르다는(욥7:6-7) 성경의 말씀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2012년을 거의 마무리해가는 이 지점에서 저는 이런 질문을 드려보고 싶습니다. 올 한해 시작하면서 계획했던 일, 기도하며 소망했던 일, 그리고 꿈꾸며 도전했던 일들을 얼마나 이루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분은 계획한 것 이상으로 성취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모두 축하하고, 함께 기뻐해야할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소망했던 일들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혹은 절반 정도만 이루어졌거나 혹은 이전보다 훨씬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하길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신 것일까? 전능자께선 과연 나의 이 어려운 형편과 처지를 헤아리고 계신가? 그분이 정말 내 기도를 듣고 계신가? 그렇다면 왜 이리 힘들게 놔두시는가?’
그런데 우리가 깨달아야할 사실은 미완성된 이 삶의 현장, 미완성된 소원과 계획의 현장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121:8) 하나님의 사람들인 성도에게 실패는 없습니다. 오직 놀라운 승리를 위한 복된 과정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인 성도에겐 미완성이 없습니다. 오직 완성을 위한 보석 같은 과정만 있을 뿐입니다. 만일 성도에게 실패가 있고 미완성이 있다면 “다 이루었다” 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실패였고 미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미국역사상 가장 전설적인 판사였던 올리버 웬델 홈즈(Oliver Wendell Holme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디에 있느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디로 가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올해의 소원이 아니라 내년의 꿈과 비전이 아니라 인생 전체의 삶의 방향이 어디로 정해져 있으며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여’ 라는 큰 그림으로 정해져 있다면 그것은 이미 완성이, 성취가, 결실이 보장된 삶입니다. 여러분! 부분을 보지 마십시오. 전체를 바라보십시오. 작은 그림을 그리지 마십시오. 큰 그림을 그리십시오. 뒤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앞을 바라보십시오.
* 누가복음 9장 6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밭고랑을 갈고 있는 사람이 앞은 보지 않고 뒤를 보고 있다면 그 밭고랑은 구불구불 휘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를 삶의 최고의 꿈과 비전으로 정하고 나아가는 사람이 뒤의 일에 얽매여 있다면 그의 삶은 구불구불 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나온 한해 이루고 싶었는데 못 이루었다고, 계획하였는데 훨씬 어려워 졌다고 낙심하고 절망하며 주저앉아 있을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발걸음의 보폭을 다 재고 계시고 머리털 까지 다 세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형편을 모르실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고 그분의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닙니다. (사59:1) 전능자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렘32:27) 그렇습니다. 내가 걷는 길은 실수가 있지만 전능자와 함께 걷는 걸음에는 결코 실수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내가 품은 뜻과 계획에는 갖가지 함정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가는 뜻과 계획에는 한 치의 오차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성도의 삶의 하루하루, 시간 시간은 바로 그 영광의 하나님 손에 의해 인도받는 쉴 만한 물가요, 의의 길이요, 복락의 잔이 성취되는 길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잠19:21) 믿음의 사람이란 부분을 보고서 날뛰는 사람이 아니라 전체를 보고서 초연히 걷는 사람입니다.
* 정자와 난자가 결합되어 하나의 생명체가 됩니다. 참으로 신비한 과정입니다. 그러나 모태에 심겨진 그 수정란을 완전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모태에서 하루 이틀을 지나고 10개월의 시간을 지나는 동안에 완전한 사람으로 서서히 채워져 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모태에서 10개월을 지나는 동안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기에 이렇게도 오묘하고 섬세한 몸이 만들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자와 난자 속에 과연 그토록 신비하고 위대한 힘이 있는 것일까? 그렇습니다. 수정된 세포 속에는 인간의 실체에 관련된 설계도가 다 내장되어 있어서 세포분열을 거듭해가며 오장육보 사지백체를 지닌 사람으로 지어져갑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설계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정자와 난자에 의해서 수정된 세포 속에는 단지 육체만이 아닌 영혼까지 만드는 힘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모태에서 그 역할을 해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겠지만 모태가 해주는 역할은 영양과 산소를 공급해주고 적당한 온도를 유지해 줄 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정자와 난자의 세포 속에 육체만이 아닌 우리의 영혼까지 만들어내는 요소가 숨겨져 있을까요? 육체는 물질적인 것이지만 영혼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삶에는 우리가 도무지 깨달을 수없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지만 실제로 우리 자신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걷지만 우리가 걷는 길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분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실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언제나 최고이상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 오늘 본문의 말씀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서는 풍성한 재물을 쌓아놓고 즐기며 누리며 살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하고 인색하게 사는 사람들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사람이 삶을 사는 목적이 재물을 모으고 그것을 자신 즉 육체를 위하여 사용하는 것에만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동물적입니다. 영혼의 존재가치를 상실한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의 존재가치의 최고는 보이는 세계에서 보여 지는 일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존재케 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기쁘시게, 영광되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어쨌든 저는 오늘의 이 말씀을 약간 다른 각도에서 증언하고자 합니다.
* 한 부자가 한해의 농사를 시작하면서 소원을 품었습니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많은 소출을 거두어야지. 그러려면 비도 적당히 오고 햇빛도 좋아야 할 텐데......’ 봄에 씨를 뿌리고 나서 여름에 풍성히 자라 오르는 곡식들을 보며 부자는 더 큰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래, 이렇게만 자라준다면 가을엔 계획했던 것보다 더 풍성히 거둘 수 있겠는걸. 더욱 많은 소출을 거두었으면 좋겠다.’ 가을이 되자 그의 밭은 풍성한 곡식으로 가득했고 거두어들인 소출은 소원했던 것, 계획했던 것보다도 훨씬 많았습니다. 얼마나 풍성했던지 쌓아둘 곳이 없었습니다. 뜻하지 않은 고민거리였으나 그것은 행복하고 즐거운 고민이 되었습니다. ‘이런 고민이라면 백번 천 번을 해도 좋겠다.’ 생각하며 부자는 기존의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서 소원의 결실, 꿈의 열매들을 다 채워 넣기로 계획했습니다. 그리고 평안히 쉬고 먹으며 마시고 즐거워하리라는 멋진 꿈까지 다시 세웠습니다. 부자는 온 몸에 전율이 느껴질 만큼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그 자신의 영혼 앞에 드리워진 운명을 깨닫질 못했습니다. 자신에게 영혼을 심어주신 분께서 그 영혼을 도로 찾으시려는 계획이 그 밤에 이루어짐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완성되었으나 미완성 되었습니다. 성취했으나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그가 꿈꾸고 소원한 대로 풍성히 열매 맺고 거둠에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삶의 가치는 소원에 넘치게 거두었든 혹은 소원한 것에 절반만 거두었든, 계획한대로 잘 성취되었든 그렇지 못하든 그 삶이 누구에게 속해있고 그 삶이 누구를 위한 삶인가? 하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부요는 풍성한 물질의 헌신에 앞서 나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전적으로 옳음을 믿고 따르는 아멘의 삶에 있습니다.
아멘의 의미는 부하든 가난하든, 성공했든 실패했든, 완성이 되었든 미완성이 되었든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한 해를 마감하는 시점에 가까워 옵니다. 우리는 무엇을 마음을 두고 있습니까? 꿈꾸고 계획한 대로 거둔 소출로 즐거워합니까? 아니면 그렇지 못하여 슬퍼하고 낙심하며 절망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자신으로 언제나 소망입니까? 올해도 내년에도 우리의 꿈과 비전은 오직 하나님자신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부요한 삶이란 오직 하나님자신을 꿈꾸는 삶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을 꿈꾸는 삶에는 미완성과 실패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