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 안에 있는 혈관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혹 알고 계십니까?
그 길이는 무려 약 12만km라고 합니다. 지구의 한 바퀴의 길이가 대략 4만km이니까 지구를 세 번 도는 길이의 혈관이 우리 몸 안에 있는 것입니다. 피가 돌지 않으면 몸이 생명의 능력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온 몸의
구석구석까지 혈관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혈관을 따라 혈액이 심장에서 나온 뒤 몸 전체 즉,
12만km를 돌고서 다시 심장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시간은 약 18초 정도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12만 km를 한 바퀴 도는 속도가 겨우 18초 정도 된다니 어마어마하게 빠른 생명의 속도가 우리 몸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몸이 곧 생명 덩어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귀하고 보배로운
생명을 엉뚱한 곳에 사용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생명은 귀한데 삶을 귀하게 살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12만 km의 거리를 가진 혈관의 무게는 체중의 3%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혈관이 도대체 어떻게, 무엇으로 만들었기에 그 장대한 길이 임에도 불구하고 체중의 3%밖에 되지 않을까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이,
생명이 신비입니다.
*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사람이 생명체로 잉태되어 출생될 때까지의 과정입니다. 정자와 난자는 각각
하나의 세포입니다. 그런데 고작 이 두 개의 세포가 10개월을 지내는 동안 무려 100조개의 세포로 성장하여
사람이라는 완전한 생명체가 되는 것입니다. 달랑 두 개의 세포에게 무슨 힘과 능력이 있어서 100조개의
세포로 성장하여 사람이 되겠습니까? 여성의 뱃속에 심겨진 정자와 난자 속에 10개월 동안 도대체 어떤 일이, 무슨 작용이 일어나 길래 단 두 개의 세포가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알려진 신비입니다.
들어난 기적입니다. 그러나 그 비밀스런 과정을 전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정자와 난자가 사람으로 창조되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시139:14) 그렇습니다. 생명이 신비요, 인생길이 신비요, 죽음과 그 다음세계가 신비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우리들의 지혜와 이성, 지식과 경험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밝혀 낼 수 없는 신비스러운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죽었던 사람이 새 생명을 얻는 부활에 대한 내용입니다. 납덩어리가 달린
채찍으로 온 몸에 생체기를 당해서 성한 곳이 한곳도 없으셨던 예수님의 몸(Passion of Christ), 게다가
그 손과 발에는 대못이 박히고 옆구리는 예리한 창으로 깊이 찔림을 당한 채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 그렇게
짐승처럼 처절하게 죽임을 당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몸에서 새 생명의 능력, 부활의 영광이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 6-7절에서 말씀합니다. “무덤에 들어가서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쌓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물과 피를 다 쏟아 내신 채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주검은 온데간데없습니다. 다만 주님의 시체를 싸맸던 세마포와 수건만이 서로 다르게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그리스도의 몸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도대체 죽음이라는 절대절망이 내려앉은 그 무덤 속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기에 죽음이 생명으로, 죽음이 부활로 뒤 바뀌는 신비하고 영광스러운 일이 일어났을까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밝혀내고 싶어도 정자와 난자 속에 임하는 신비한 일처럼 도무지 밝혀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그 사실을 직접 체험한 막달라 마리아뿐만 아니라 베드로와 요한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역사적 사실이요 실재였습니다.
* 사도행전 1장 3절에서 말씀합니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
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그렇습니다. 부활은 신비하고 놀라운 일이었지만 증거가 확실한 실제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의 이성으로 깨달을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고, 지식으로 알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에는 믿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깨달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알 수 있는 영역에서 벗어난 것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오늘 생명을 얻고 사는 것이 스스로가 계획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존재하듯이, 또한 죽음이 언제 우리 앞에 이를지 알지 못하고 살아가지만 죽음이 반드시 찾아오는 것처럼 부활도 우리가 아직 체험하지 못했지만 우리에게 반듯이 예정되어 있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약속인 것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40)
* 이런 재미난 생각을 한번 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돌멩이를 다이아몬드로 바꿔주는 왕이 있다면 말입니다. 정말 그런 왕이 있었으면 좋겠지요? 그러나 그 왕이 살고 있는 곳은 사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참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일이 있다면 사흘 길이 아니라 열흘길이라도 분명히 너나 할 것 없이 신바람 나서 자신의 마당에 널려 있는 돌멩이를 다 모아다가 왕에게로 달려갈 것입니다. 그 돌멩이를
지어 나르는 일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아무리 땀이 비 오듯이 쏟아져 내리더라도 돌멩이를 지고서 왕에게 가는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돌멩이의 가치와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전혀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흘 길, 아니 열흘길을 돌멩이를 지고 수고함보다 다이아몬드를 손에 쥐는 일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인생 팔십년의 삶을 투자하여 영원히 사는 영생의 길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영생의 삶은 눈물과 고생, 한숨과 걱정, 절망과 죽음이 난무하는 이 땅이 아닙니다. 그곳은 오직
기쁨, 절대평화, 끊임없는 감사가 흘러넘치는 곳, 하늘에서 펼쳐집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22:5) 이 땅의 삶을 돌 짝밭 같은 삶으로 비교할 수 있다면 하늘에서의 삶은 금은보화의 삶으로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땅의 삶이 가치 없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삶을 잘 살면 별보다 빛나고, 해보다 장엄하고, 꽃보다
아름다우며, 과일보다 탐스럽습니다. 그만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 부활 속에 펼쳐진 영생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생의 삶에 목적을 두고 살지 않습니다. 현실에 급급하여 삽니다.
영리하고 똑똑하고 재능이 많은 것 같은데 왜 자신의 그 깊은 영혼에서 울려나오는 소리, 영원을 사모하는
영혼의 소리는 듣지 못하고 사는지 말입니다. 여러분의 내면에서 울려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반드시 이런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얘야! 보배롭게 살자, 진실하게 살자. 사랑으로 살자. 섬기며 살아가자.’
* 사람이 참 똑똑합니다. 핸드폰을 만들어 내는 사람도 똑똑하지만 그것을 다루는 사람들도 굉장히
똑똑합니다. 그 기능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척척 입니다. 헝가리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미국으로, 세계어디에서든지 서로 원하기만 하면 순식간에 얼굴을 보고 통화할 수 있게 된지가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15년 전, 20년 전에 상상으로만 여겨졌던 일이 현실에서 그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이렇게 똑똑한데도 ‘왜 자신의 영혼이 돌아가야 할 곳은 생각지도 못하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똑똑한 바보입니다. 우리가 죽게 되면 몸은 땅에 묻게 되지만 영혼은 도대체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영혼을 땅에 묻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깊이 말씀드립니다. 진정한 천재는 자신의 영혼의
처소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똑똑한 사람은 자신의 영혼이 돌아갈 본향을 위하여 자신의 80년 인생을 그 본향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 오늘 본문 9-10절의 말씀입니다.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 가니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을 보았다면 부활의 가치로 살아야 합니다. 부활을 목격하였다면 부활의 능력과 비전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 죽음이 죽음으로 끝이 아니구나! 죽음 뒤엔 새 생명이 기다리고 있구나! 이 세상이 끝이 아니구나. 영원히 거할 새로운
세계가 있구나.’ 하며 육체에 매여 전전긍긍하는 삶이 아니요, 먹고 마시고 입고 잠자는 무가치한 삶이 아닌
새 생명을 위할 삶으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삶으로 그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 다음으로 부활의 영광이 임했던 곳을 보았던 베드로와 요한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고서도 보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새 생명의 영광의 힘과 능력이 터져났던 곳에 있으면서도 도무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 보고서도 보지 못하는 어두운 백성이여! 아! 그 영광의 장소에 있으면서도 그 영광을 깨닫지 못하는 우둔한 백성이여!’
* 이러한 베드로와 요한에 대하여 누가복음 24장 12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 가니라.”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왜 주님의 몸은 없고 세마포만 있는 거야?
주님은 어디로 가신거야?’ 이상히 여기기는 했으나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께서 종종 일러주신 부활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부활의 증거들을 보고서도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여기고 되돌아 간곳은
육체가 거할 곳, 집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보고서도 보지 못하는 그 어두운 영성, 듣고서도 듣지 못하는
사막 같은 영성을 지닌 사람들이 돌아갈 곳은 육체의 터전인 집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집은 영원히 머물
곳이 못됩니다.
*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육체가 거하는 곳, 집으로 돌아갔다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미래지향적인
삶이 아닌 현실지향적인 삶의 자리로 돌아갔다는 뜻입니다. 천국 지향적인 삶이 아닌 먹어도 먹어도 결코
배부르지 못하고, 채워도 채워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육체 지향적인 삶의 자리로 곧 죽음 지향적인 삶의
자리로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부활에 대하여 어떤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정말 부활을 확신하며 오늘의 삶을 그 때, 그 세계를 위하여 헌신하고 있습니까? 혹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영생을 믿기는 믿지만 실제적은 아니라고 여기는 분이 있지는 않습니까? 보면서도 부활을 깨닫지 못하는 어두는 영성을 지녔던 베드로와 요한처럼 혹 우리도 그런 어두운 영성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닙니까?
* 부활과 영생은 삶의 완성이요, 인생의 열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인생이라는 세월을 사는 유일의 이유와
목적은 부활과 영생을 소유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부활을 발견하고 깨달은 사람은 결코 집으로 돌아 갈 수
없습니다. 집은 먹고 입고 마시고 잠자는 곳이지 사명자의 자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활을
믿습니까? 오늘의 삶을 사명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먹고 배부를 삶이 아닌 먹고 배고플 삶으로, 모아서
부자 될 삶이 아닌 모아서 가난할 삶으로, 높아져서 권세누릴 삶이 아닌 높아져서 낮아질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영광을 입을 사람들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15:4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