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전쟁에서 승승장구하였지만 여전히 겸손으로 마음을 여미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던 사람! 다윗을 알고 계십니까? 여호와의 궤가 오벳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 자신의 옷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추며 뛰놀 줄 알았던 순진무구했던 사람! 다윗을 기억하십니까? 자신은 백향목으로 지어진 궁에 거하는데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었던 것을 보며 하나님을 위한 성전 짓기를 소원했던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 다윗을 발견하셨습니까? 그의 겸손은 하나님께 기쁨과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 이니까요. 그의 순진무구함은 하나님의 행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을 사랑하시니까요. 또한 그의 하나님 사랑은 자신에게 복에 복을 낳았습니다. 복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니까요.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겸손과 순진무구와 사랑이 계속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랬더라면 그의 삶뿐만 아니라 그의 자녀들의 삶,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고난당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뼈를 깎아 내는 듯한 비극의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요.
자녀들 간에 혈전이 일어나고, 자식이 아버지의 자리를 탐내어 반역을 일으키고,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남과 북으로 분단되는 아픈 역사, 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비극의 씨앗은 바로 다윗 자신이었습니다. 그가 고백하였습니다.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시39:10).
끝없는 충성! 절대충성!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할 우리의 삶의 자세입니다.
* 우리는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됩니다.
이스라엘 군대와 신복을 이끌고서 전장의 선봉에 서서 진두지휘(陣頭指揮)했어야할 다윗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명을 건 전장 터는 신복들과 군대에게 맡겨두고 그 자신은 웬일인지 예루살렘 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오후 잠을 잔 후, 깨어난 다윗이 왕궁의 지붕을 거닐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보지 말았어야할 장면인 한 여인의 목욕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 그 여인이 심히 아름다워 보인 것입니다.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창3:6)
여기에 걸려들면 안 될 텐데. 보고서 마음까지 빼앗기면 안 될 텐데.
* 그래도 여기까지는 있을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일입니다. 왕도 사람이니까 육체의 피곤함 때문에
전장을 신복에게 맡기고 잠을 청할 수도 있겠고 또 눈이 있으니 어쩌다가 여인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서 ‘아름답다.’ 마음에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결코 완전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다윗이 그 넘지 말아야 할선을, 결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보고서 마음을 다스렸어야 했는데 마음을 빼앗겼고 마음 닿는 대로 행동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그 여인은 한 남자의 사랑하는 아내였고 그의 남편은 지금 현재 전장에 나아가 왕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자신의 충성스러운 군인이었습니다. 다윗은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밧세바와 더불어 동침을 합니다.
이 얼마나 큰 죄악입니까? 악한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저지르는 이 죄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이제까지의 다윗이라면 즉, 하나님을 향하여 겸손하고 순진무구하며 사랑으로 충만했던 그 다윗이라면 밧세바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서 ‘이러면 안 되지!’ 하고 마음을 급히 정화시켰을 것입니다. 최소한 밧세바가 자신의 부하인 우리아의 아내라는 것을 알았다면 ‘내가 결코 이럴 수 없다.’ 하며 절제의 자리로 나아가 마음을 다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충성스러웠던 다윗이 어찌 한 순간에 파렴치범이
되고, 그 순진무구했던 다윗이 어찌 이토록 악한 일을 저지른단 말입니까?
그 빛나던 다윗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그 보배로운 다윗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입니까? 진정, 이 추악한 악으로 떨어져 내린 사람이 그 사람 다윗 맞습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성전을 짓겠다고 진실 되게 고민하며 아파할 줄 알았던 사람 말입니다. 아쉽게도 그렇습니다. 그가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 한 사람에게서 그토록 겸손하고 순진무구하며 충만한 사랑이 나타날 수 있으며, 어찌 그 한사람에게서 그토록 파렴치하고 더러운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말입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무엇이 다윗 한 사람을 그토록 극과 극으로 맞서게 할까 말입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12:35) 그렇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을 누가 무엇이 통치하며 다스리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을 스스로에게 맡겨두지 마십시오. 마음은 통제하지 않으면 슬픔으로, 절망으로, 낙심으로, 악으로 마구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통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마음을 움켜쥐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써 그의 몸에서 생명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결코 마음을 풀어 놓지 마십시오.
* 그런데 다윗의 문제는 우리아의 사랑하는 아내였던 밧세바와 동침한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아니 한번 시작된 그의 악행이 그의 삶을 어디론가 마구 달음질치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과 동침했던 밧세바가 잉태를 한 것입니다. 원치 않았던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은 아주 교묘한 술수를 씁니다. 전장에 나가있던 우리아를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여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게 한 것입니다. 잉태된 아기의 정체를 바꿔치기하려는 수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왕궁 문에서 신복들과 함께 잡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삼하 11:11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아가 대답했습니다.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의 군인들이 장막에 머물고 있습니다. 나의 주 요압과 그의 부하들도 들에서 잠을 자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찌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며 제 아내와 함께 잠자리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얼마나 충성스럽고 아름다운 부하입니까? 이러한 백성이 자신의 백성이고 이러한 사람이 자신의 사람이라면 얼마나 행복하고, 얼마나 가슴 벅찬 일입니까? 우리아의 충성과 다윗의 끝 모르는 죄악이 너무나 극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삶에 우리아와 같은 남편, 우리아와 같은 아내, 우리아와 같은 아들, 친구, 동료들이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다윗은 잉태된 자신의 아기의 정체를 바꿔치기하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이번엔 또 다른 수작을 감행합니다. 불의의 창수, 악의 태풍에 휘감긴 그의 수작은 이러했습니다.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붙여 요압에게 보내니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저로 맞아 죽게 하라.” (삼하11:14-15) 이 얼마나 끝 모르는 악의 첩경에 선 수작입니까? 죄악이 그의 몸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그토록 충성스러운 자신의 백성의 목숨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죽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오히려 빛나는 그 충성스러움을 보고 상을 내리고 은혜를 베풀어야할 사람에게 어찌 살인을 가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떡 먹듯이 자신의 백성을 먹어치우는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아름다웠던 다윗 맞습니까? 도대체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한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충성스러웠던 다윗 맞습니까? 도대체 무엇이 다윗을 이토록 형편없이 만든단 말입니까?
‘아! 몸의 욕심에 사로잡힌 영혼이여! 그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름다운 여인이야!’ 했던 그 작은 죄의 시작이 끝 간줄 모르고 그 영혼을 삼켜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결코 큰 것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것으로 부터 시작하고, 은밀한 것으로 유혹합니다. ‘괜찮아! 딱 한번이야! 이번이 마지막이야!’ 여러분! 혹, 우리가 여기에 노출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인생파행은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결코 마음에 틈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바늘구멍 같은 마음의 틈을 소홀이 여기지 마십시오. 사단은 바로 그 틈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수백평의 터에 온갖 보화와 백향목으로 지은 궁전에서 살면 무엇 하겠습니까? 그 생각이 더러운 것을요. 살찐 송아지를 비롯한 온갖 진미의 양식을 먹으며 살면 무엇 하겠습니까? 그 행위가 끝없이 악한 것을 말입니다. 진품, 명품의 아름다운 옷을 걸쳐 입으면 무엇 하겠습니까? 그 삶의 행태가 짐승인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면 그 삶에서는 합당치 못한 육체의 본성들이 마구 쏟아져 나옵니다. 마치 쓰레기통에서 쏟아져 내리는 오물처럼 불의와 추악, 탐욕과 악의, 악독과 살인이 그 삶에서 거침없이 쏟아져 내리는 것입니다.(롬1:28-29) 육체가 육체를 향하여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은 자기 즐거움 자기 욕심이요, 자기 탐욕 자기 영광입니다. 그리고 육체로 육체를 삼켜서 만족을 모르게 합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괜찮아! 이 정도 가지고 되겠어? 이래 뵈도 내가 누군데...... 이 정도라면
괜찮을 거야! 인생이 별거 있어. 나에게 좋으면 되는 것이지.’ 육체대로 살면 처음엔 달콤한 것 같아도 그 끝은 쓰디쓴 후회와 허무입니다. 그 사람! 다윗이 고백했습니다. “주께서 죄악을 경책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 먹음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각 사람은 허사뿐이니이다.” (시39:11).
*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는 그 피조물들을 통하여 영광과 찬양, 기쁨과 즐거움을 받으시기
위함이지 그 몸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성령이 끊임없이 우리 영혼에 부어져야 합니다. 성령이 육체에게 끊임없이 부어지면 그의 몸은 불의의 병기가 아닌 의의 병기, 사람의 도구가 아닌 하나님의 도구로 그 빛을 발하며 살게 됩니다. 또한 그의 삶에서는 자기 즐거움 자기 자랑이 아닌, 하나님을 영화롭게 기쁘시게 영광되게 하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애야! 꽃은 마르고 잎은 시들잖니? 인생도 마찬가지야. 잠깐 사는 삶을 이 땅에 속한 일을 위해 살 수는 없잖아! 너의 생명은 보배롭고 존귀한 거야! 선으로 악을 이기렴. 너의 몸으로 하나님처럼 살렴.’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오늘 우리는 누구입니까? 죄가 왕 노릇 하는 다윗 같은 그 사람입니까? 아니면 우리아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이 사람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