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이 물과 나무와 새들이 노니는 자연 속으로 들어가면 평안한 마음과 여유로움의 쉼을 얻는데
사람이 사람들이 사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면 왜 종말의 위기를 느낄까요? 무엇을 차이일까요?
* 여러 명의 부인을 두고 있었으면서도 몸의 사욕, 육체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밧세바가 한 사람의
사랑하는 아내 된 여인임을 알면서도 뻔뻔하게 동침한 다윗! 그 동침함으로 아기가 잉태하자 아기의
정체를 바꿔치기 하기 위해 교활한 수작에 수작을 부렸지만 그것이 제 뜻대로 되지 않자 더욱 악으로
치닫는 다윗! 이미 짐승으로 변한 다윗이 한 여인의 자랑스러운 남편이요, 자신에겐 충성스런 부하였던
우리아를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저로 맞아죽게 하라”(삼하11:15) 참으로 끔찍한 생각과 도발입니
다. 그 아름다웠던 소년 목동 다윗은 어디가고, 골리앗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맞섰던 그 용감무쌍했던
다윗은 어디로 가고, 그 충성스런 다윗은 어디로 가고 육체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가정 파괴도
서슴지 않고 살인도 서슴지 않는 황무한 다윗만이 남아있다는 말입니까?
* 육체를 얻으면 영혼이 무너지는 것을, 세상을 얻으면 하늘을 잃는다는 것을 다윗은 정녕 몰랐다는
말입니까?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안목의 정욕, 육체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것
들을 그리스도로 제어하지 않으면 안목의 정욕이 삶을 갉아먹고, 육체의 정욕이 영혼을 도적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을 얻으려 눈독 들이는 것이 아닌 하늘을 얻으려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육체를 얻으려 몸부림치는 것이 아닌 영체를 세우기 위해 온 삶을 투자해야 합니다. 육체의 것은 무너지는 것이나 영체의 것은 영원히 세워지며, 세상의 것은 안개처럼 사라지나 하나님의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얻었으나 잃는 삶이 아닌 잃었으나 얻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죽은 것 같으나 펄펄 뛰는 삶, 모자란 것 같으나 충만한 삶, 무명한 것 같으나
유명한 삶으로 푯대를 세워야 합니다.
* 오늘 본문 26-27절의 말씀입니다. “우리아의 처가 그 남편 우리아의 죽었음을 듣고 호곡 하니라.
그 장사를 마치매 다윗이 보내어 저를 궁으로 데려오니 저가 그 처가 되어 아들을 낳으니라.” 자신의
살인지시로 탐욕의 방해거리였던 우리아가 죽자 다윗은 기다렸다는 듯이 밧세바를 궁으로 데려와 처를
삼았습니다. 이젠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완성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이젠 됐어! 좀 어려움은 있었
지만 지금부턴 괜찮을 거야!’ 우리아가 죽자 복잡 미묘했던 모든 상황이 다 종결되어 마음 편히 육체를
즐겁게 할 일만 남은 것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었습니다.
다윗의 그 모든 행위, 그 모든 언사를 처음부터 밧세바를 궁으로 데려오는 약 1년 정도의 시간까지
하나님께서는 낱낱이, 뚫어지게, 오래도록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삼하 12:1). 하나님께는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은밀할 것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혹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불꽃같은 눈동자를 지니신 하나님의 눈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바다 끝의 모래 알갱이 하나라도, 우주 공간에 떠도는 미세먼지 한 조각이라도, 땅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미생물 한 마리의 움직임이라도 다 헤아려 알고 계신 분이 바로 하나님 이십니다. 그런데
거짓말 하는 자를 모르실 리가........ 파렴치범을 모르실리가........ 간음하는 자를 모르실 리가.........
가정 파괴범을 모르실 리가........... 살인범을 모르실 리가.......... 양심을 팔아먹는 이를 모르실리가
있겠습니까? 그 분은 우리를 보고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요? 하나님으로 미소 짓게 하는 사람들, 하나님으로 춤추시게 하는 사람들, 하나님으로
행복하시게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드러낸 다윗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오늘 본문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한 성에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양과 소가 심히 많은 부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부자와는 도무지 견줄 수 없는 작은 암양새끼 한 마리를 기르는 아주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부자는 자신의 양과 소를 아주 귀히 여겼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암양새끼를 자신의 목숨만큼이나 귀히
여겼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소유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잣집에 한 여행자가 손님으
로 오게 되었습니다. 여행자는 결코 가난한 사람의 손님이 아니었습니다. 부자가 생각했습니다. “손님
이 왔으니 대접은 해야겠는데 내 양과 소를 잡기는 너무 아까워. 어떻게 하지? 그래! 저 보잘 것 없는 사
람! 그의 양 새끼를 잡는 거야.” 결국 부자는 가난한 사람의 전부였던 암양새끼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에게 온 손님을 위하여 잡아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 과연 이런 일이 있겠습
니까? 예, 부끄럽지만 넘치고도 넘칩니다. 양심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과연 이런 일들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 부끄럽지만 사람은 그런 일을 하고도 남습니다. 세상엔 육체를 채우기 위하여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들이 참으로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바라보신 다윗은 바로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것은 남겨두고 남의 것을 강탈하는 사람! 자기 것은 귀히 여길 줄 알았지만
남의 것은 하찮게 여기는 사람! 즉 육체를 위하여 영혼을 팔아먹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 본문 7 절에서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고발합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고발당하는 ‘그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 사람’은 육체를 위하여 욕심 부리다가 영혼을 강탈당하는 사람이요, ‘그 사람’은 얻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잃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남의 아내였던 밧세바를 자신의 처로 소유하기는 했습니
다. 그러나 그가 소유한 것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을 잃고 또 잃었습니다.
본문 10-12절에서 말씀합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네가 내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다윗은 무엇을 얻었습니까? 과연 그는 얻는 삶을 산 것입니까?
땅의 것을 얻고자 했으나 땅의 것을 더욱 많이 잃었고 그것 때문에 고통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으론 파산의 상태에 까지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사람이 온 천하를 얻었을지라도 제 목숨 즉, 그 영혼을 잃어 버렸다면 그 온천하가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진정한 가치는 온 천하라는 세상 것이 아닌 자신의 목숨, 즉 하나님과 하나 된 영혼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이토록 땀 흘리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잃으나 얻는 삶을 사는 것입니까? 아니면 얻으나 잃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잃음과 얻음의 사이에서 오직 주님으로만 사는 우리 모두가 되어 영원한 영광을 얻는 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