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제 본문 7-9절의 말씀 보겠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라고 기록된 말씀처럼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서 나오신 분으로 전능하신 분이셨지만 동시에 우리 사람들과 똑 같은 인성을 가지셨던 분으로 시험과 고난, 눈물과 탄식, 두려움과 고통가운데서도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던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피할 수 없어서 십자가의 고난 길로 오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힘과 능력이 없어서 채찍에 맞고 조롱당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수난과 죽음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살장으로 묵묵히 끌려가는 양처럼 그저 순종, 순종,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나? 준비된 사람 그가 장성한 사람입니다.
2. 여러분! 순종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내 마음에 기쁜 것은 행하고 내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것은 거부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순종이란 내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아멘 하는 것 입니다. 이해할 수 없어도, 부당하다고 여겨져도 그리고 감당할 수 없을 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순종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수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밀알이 ‘나 죽기 싫어! 나 썩기 싫어!’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로 부름 받은 성도들이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함에 대하여 순종하지 않는다면 어찌되겠습니까? 죽어야만 살게 되는 것!!! 순종할 때 하나님의 예비된 영광을 보게 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역설입니다. 100세에 얻는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서슴없이 순종했던 아브라함!!!
3. 이사야서 53장 6-7절의 말씀 보겠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사랑의 크기는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은혜의 높이는 무엇으로부터 온 것일까요? 차고 넘치는 사랑을 누리고 있는 성도들이여!!! 끝없는 은혜가운데 있는 택함 받은 사람들이여!!! 우리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예수님께서 순종하심으로 성취된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사람들!!!!
4.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히브리서 기자는 왜 예수님의 순종하심에 대하여 힘이 넘치는 필체로 오늘 본문을 기록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그렇게 순종하셨다는 것을 알리고 강조하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우리 성도들도 바로 주님처럼 그렇게 순종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인가?
본문 9절의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순종하는 신앙이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그렇습니다. 우리는 육체와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이런 저런 시험거리가 있겠지만 주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맞서고 인내해야 합니다. 그리고 설령 고난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주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육체를 이기고 순종으로 통과할 때, 순종으로 통과된 신앙이 될 때 마침내 그는 성숙한 성도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외적인 질문: 명성교회장로가 낫을 들었던 일: 그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낫을 들었나? 그는 과연 순종이라는 의미를 알고 있는지?)
5. 그리스도인의 성장과 성숙은 자기를 꺾는 고통 없이 고난 없이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숙한 신앙의 삶은 고난과 고통가운데서도 묵묵히 주님을 따르는 순종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이, 다니엘이, 모세가, 다윗이 길고 긴 자기를 꺾어야 하는 고난의 터널 속에서도 여전히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듯이 말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성도 여러분! 진실로 우리는 순종의 사람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항거하는 사람입니까?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우리를 그 순종의 길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6. 이제 본문 12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의 연수가 몇 해나 됩니까?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처음 믿을 때와 5년, 10년, 20년, 30년 그리고 그 이상인 오늘 여러분의 신앙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때가 오래 되었음으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여러분! 이 말씀이 우리의 심령을 깊이 찌르지 않습니까? ‘너! 예수 믿은 지 오래되었잖아? 그렇게 오래도록 예수를 믿었다면 벌써 남을 지도하고 이끌어가는 선생님과 같은 신앙인이 되었어야 마땅하지 않아? 키가 성장해 가는 만큼이라도, 얼굴에 연륜이 깊어져 가는 만큼이라도 성숙되어지고 성화되어지는 믿음의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
7. 그렇습니다. 교인들 중에는 어린아이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 성숙한 어른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어린아이 같은 신앙은 연약합니다.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세계 안에 머물러있습니다. 베풀 줄은 모르고 나만 위해 달라합니다. 그래서 툭하면 교인들에게도 삐지고 심지어는 목사에게도 삐집니다.
그에게서의 순종은 멀리 있습니다. 순종이 멀면 주님도 멉니다. 그런데 성숙한 어른 같은 성도는 어떻습니까? 이미 자신의 세계를 벗어나 하나님의 세계를 살아갑니다. 그래서 받기보다 베풀며 살기를 기뻐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일을 하다가 이런저런 일이 일어날지라도 삐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 이라는 거룩한 목적을 향해 묵묵히 순종하며 나아갑니다.
늘 베풀며 살기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의 명령이니까 순종하는 것입니다. 맘 상하게 하는데 삐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좋은 것은 깊이 새기고 나쁜 것을 뒤로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을 따르는 성숙한 신앙인이니까요.
8. 그렇습니다. 성령의 감동하심 가운데 전하는 히브리서 기자의 메시지는 예수님을 믿는 자의 삶의 진보, 신앙으로 변화된 삶의 능력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지 5년, 10년, 그리고 그 이상이 되었다면 가르침만 받으려 하지 말고 가르침 받은 대로 살아내는 삶의 선생님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느 지점에 머물러 있습니까? 진정, 성숙한 어른의 신앙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젖먹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가운데 있습니까? 이것을 아십니까? 순종도 실력이고 인격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본문14절에서 증언합니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피아노도 자주 연습하면 실력이 되듯이 선생님 됨의 성숙한 신앙인도 순종함으로 완성되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아직도 어린아이 같다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