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올 해는 삼일운동 백 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일제의 폭정아래 살던 우리 대한 조선은 얼마나 고통이었으며 얼마나 어두움이었겠습니까? 그러나 나라를 빼앗긴 채 살 수 없었기에 죽음을 불사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던 것입니다. ‘대한독립만세!!!’ 서대문형무소에서는 올해 삼일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서대문 형무소 삼일 운동 수감자 자료집’ 발간했습니다. 당시 서대문 형무소에는 삼천 칠십 명이 구속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 수형기록이 남아있는 사람이 천 십 사명입니다.
15살의 학생으로부터 69세의 노인까지 그리고 80여종의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마차꾼 점원, 심지어 고리대금업자까지) 수감 되어 고초를 당했습니다. 그야말로 대한독립은 남녀노소 불문한 모두의 열망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관순열사는 8호 감방에 갇혀있었는데 한 평 정도의 공간에 7명 혹은 10명씩 가두어서 제대로 앉지도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럼에도 독립을 향한 노래는 계속 울려 퍼졌다고 합니다.
당시 유관순 열사가 8호 감방에 구속된 사람들과 함께 옥중투쟁을 하면서 부른 노래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진중이 일곱이 진흙 색 일복입고 두 무릎 꿇고 앉아 주님께 기도드릴 때 접시 두 개 콩밥덩이 창문 옆에 던져줄 때 피눈물로 기도 했네 피눈물로 기도 했네 대한이 살아있다 대한이 살아있다. 산천이 동하고 바다가 끓는다. 에헤이 데헤이 에헤이 데헤이 대한이 살아있다 대한이 살아있다.”
그 자유를 향한 투쟁과 헌신이 일본의 총칼을 뚫고 잃었던 나라를 되찾게 한 것입니다. 대한독립만세!!! 빼앗겼던 주권과 자유를 되찾아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주님의 성도 여러분! 나라를 빼앗긴 채 살 수 있을까요? 자유를 빼앗긴 채 살 수 있을까요?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목숨 걸고라도 반드시 되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의 심장으로 내 나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성도들이 여전히 빼앗긴 채 살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진실로 우리는 자유인입니까? 주님의 십자가로 주신 내 영토, 내 기쁨, 내 소망, 내 즐거움 내 나라를 진실로 가지고 있습니까? 주님의 새 사람만세!!! 외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2.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곧 하나님의 성도들인 저와 여러분이 일생을 두고 아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1절의 말씀대로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어 성경에서는 ‘fix your thoughts on Jesus’로 번역했습니다. 예수님께 생각을 고정하라!!! 이 말씀의 의미는 삶의 모든 것을 예수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로부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 발견한 영성으로 시작한 직장생활, 사업, 학업, 자녀교육, 결혼….그들이 성취할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약속해주신 영광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가슴 깊이 새겨 넣은 사도베드로는 거꾸로 매달리는 십자가 까지 감당하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누가 감히 주님을 품고 가는 그의 길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께서 가신 길을 날마다 생각했던 마르틴 루터 킹 목사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라는 흑인인권을 위해 철의 장막을 향해 도전했습니다. 감히 누가 주님 가신 길을 따르는 그의 길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생각을 고정시켰던 유관순열사는 대한조선의 자유를 위해 그 한 몸을 기꺼이 헌신했습니다. 감히 누가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나선 그의 길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과 하나 되어 살아갔던 그들은 무명한자 같으나 시대를 넘어선 유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묶여 살아갔던 그들은 죽은 자 같으나 시대가 감당할 수 없는 생명이었습니다. 또한 주님의 십자가와 더불어 살았던 그들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였으며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 하게 하였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였습니다. 삶의 모든 것을 예수그리스도로 통과시켜 살아냈던 그들은 사단에게 빼앗겼던 주권과 영토를 되찾은 회복된 자들이었고 자유인이었으며 승리자였습니다. 그래서 늘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3. 우리인간은 세상 모든 피조물보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보배롭고 가장 존귀하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하심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the people I formed for myself that they may proclaim my praise.”(이사야 43:21)
그러나 안타깝게도 첫 사람은 죄에 넘어졌고 그 모든 복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죄로 인한 하나님의 복을 상실했다는 것은 기쁨이 슬픔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평화가 전쟁으로, 즐거움이 낙심으로 소망이 근심과 걱정으로 안식이 고통으로 복이 저주로 생명이 죽음으로 바뀐 것입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의 인간세상의 실상이 어떻습니까? 다 아우성 아닙니까? 살기 힘들다고, 죽고 싶다고, 이게 사는 거냐고,………. 즐겁고 재미나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할 수없이 사는 삶이 되었습니다. 마치 노예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우리의 모든 선한고 아름다운 복들을 다 빼앗아 가버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영토와 주권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세기 3장 23-24절)
우리의 죄악이 우리의 모든 복을 삼켜버린 것입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얼마나 애통하고 슬픈 일입니까? 내게 주신 하나님의 모든 복과 은혜를 빼앗긴 채 죽은 자처럼 살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로 다시 오셨습니다. 우리를 다시 품으시고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3장 18절) 주님께서 고난의 길을 가심으로 우리에게는 회복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 앞에는 자유와 광명과 생명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할렐루야!!!
4. 본문 2-3절의 말씀 보겠습니다.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모세는 노예 살이를 하던 이스라엘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사명을 부여 받았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그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축제여야 했고 감사와 찬송의 길이어야 했습니다. 이제 열 하룻길만 지나면 완전한 자유인이요 하나님의 회복된 이스라엘로 가나안의 보배와 풍요의 삶을 누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은 가는 길목마다 불평이요 원망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애굽의 노예생활이 더욱 좋았다고 할 지경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2-3절)
이 어리석은 백성들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애굽이 주는 밥에 체질화되어 버린 이 참담한 백성들을 데리고 어찌 가나안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럼에도 모세는 그 백성을 하나님께 중보하며 가나안으로 인도해갑니다. 얼마나 위대한 사명의 삶을 살아낸 모세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아 그 일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5. 그러나 예수! 주님은 하나님 안에서 나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찌 목이 곧은 백성을 위하여 십자가를 질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어찌 세상 사람들에게 뺨을 맞고 침 뱉음을 당하며 모욕을 당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어찌 죄의 노예 된 사람들을 위하여 그 살을 찢고 그 피를 흘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종인 모세도 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직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신실함으로 그 길로 나아가 영원한 가나안의 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
그렇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이 은혜, 이 소망, 이 자유, 이 회복, 이 영광, 이 생명은 우리 주님이 완전한 희생 제물 되어 마련해 놓으신 우리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실로 자유인으로 살고 있습니까? 불평과 원망, 낙심과 슬픔, 근심과 걱정, 시기와 다툼, 탐욕과 교만 등은 우리 성도들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를 그 모든 육체 가운데서 구속하셨습니다. 대한독립만세!!! 주님의 새 사람만세!!! 잃어버렸던 영토를 다시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세상 것에 빼앗겼던 나를 하나님의 소유로 다시 드려야 합니다. 그 힘은 오직 예수입니다.
6. 이제 본문 6절의 말씀 보겠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이 말씀에서 집이라는 것은 가족을 의미합니다. 곧 성도는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산으로 받게 됨을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심장이 견고하게 붙들고 있는 소망의 확신과 자랑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것들은 쉽게 시들고 약해지며 사라진다고 말씀합니다. 세상 그 어떤 것이 완전하며 영원할 수 있습니까? 지식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재물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권력에도 한계가 있고 젊음도 한계가 있습니다. 세상의 것에는 모두 모자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망의 확신을 두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사는 사람은 그 어떤 고난도 다 넘어서서 세상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둘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영생하게 된다는 것이 오늘말씀이 증언해 주는 약속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이 약속을 성취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영예와 자랑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예수를 깊이 생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