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님께서 이 시간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신다면 어떤 마음으로 부르실까/ 시몬아 시몬아…..주님의 음성은 베드로에 대한 기쁨의 음성일까? 근심과 슬픔 안타까움의 음성일까? /삼 년의 시간을 주님과 동고동락했는데 제자들의 영적 상태는 어떠했을까? ‘이만하면 됐다. 나의 제자답다.’ 하는 만족함이셨을까? 아니면 ‘저들이 언제나 변화될까? 하는 근심이셨을까?’/
오늘 우리들의 신앙의 연수는 몇 년인가? 우리들의 제자화 지수는 몇%일까? /음성의 톤과 색깔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오늘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 톤은 어떨까? 기쁨일까 근심과 걱정일까?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삼 년 지나면 복음의 삶을 열매 맺어야 한다. 열매 맺는 신앙이 살아있는 신앙이요 구원을 성취해가는 신앙이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2:21-22)
2. 본문 31절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사단의 유혹과 시험은 그 누구에게도 제한을 두지 않는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넘어트리려 한다. 심지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음에도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단은 예수님까지 넘어뜨리려 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마귀가 천하만국을 보이며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얼마나 교활하고 얼마나 음흉한 계략으로 덤벼드는가? 예수님까지도 넘어뜨리려 했던 사단이 우리를 가만히 놔두겠는가? 주님의 성도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을 무너뜨리려고 얼마나 혈안이 되어있는가? 먹을 것이라는 경제적인 것으로! 세상의 영광과 자랑이라는 것으로! 하나님을 보여봐. 만일 그가 살아있다면! 이라는 것으로
3. 이스라엘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다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원망했다. 그러나 인자이신 주님은 사십일의 죽음직전의 굶주림 앞에서도 하나님을 결코 앞서지 않았다. 주님의 성도는 먹을 것 곧 경제적인 시험 앞에서도 결코 하나님을 등지면 안된다. 오직 주님으로만 통과되어야 한다. 세상권력과 영화가 아무리 좋아 보여도 그것은 모래성과 같다. 우리의 유일의 예배와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백성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하여 늘 의심하며 시험하다가 진노를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없었다. 오직 하나님의 뜻하심에 순종하셨다.
4. 과연 무엇으로 세상을 이기며 사단의 시험과 공격으로부터 이겨낼 수 있을까? 주님의 성도로 부름 받은 성도는 그 모든 시험을 이기고도 남는다. 왜?우리 주님이 친히 도우시기 때문이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2:18)
키질을 통해서 알곡과 쭉정이가 가려지듯이……사단의 시험은 때로는 넘기 힘들어 보여도 오직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무릎을 꿇으면 우리는 언제나 시험으로부터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리고 알곡신앙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이 놀라운 복이 우리 모두 위에 열매 맺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5. 본문 32절: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지금 예수님 앞에는 십자가 죽음이라는 거대한 고난의 시험이 기다리고 있다. 인간의 몸을 입으신 주님이셨기에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태초부터 하나님 안에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어찌 이런 고난과 수모를 겪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도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그들이 주님을 버리고 뿔뿔이 도망칠 것을 아셨음에도, 그들이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것을 아셨음에도 심지어 그들이 돈 몇 푼에 주님을 팔아넘길 것을 아셨음에도 기도하셨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17:9-12절)
6. 예수님의 기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주님의 그 기도는 바로 여러분들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겸비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때도 때론 교만하여 하나님과 멀어질 때도, 우리가 가난하여 눈물 흘릴 때도 때론 부해져서 하나님보다 세상 것을 더 사랑 할 때도, 우리가 실패해서 절망할 때도 때론 승승장구하며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영광을 드러내고자 할 때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히7:25)
어떤 믿음이어야 할까? 어떤 삶이어야 할까? 어떤 성품으로 열매 맺어야 할까? 주님은 왜 무엇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살아계셔서 기도하실까? 주님의 기도가운데 힘을 얻은 베드로는 실패한 자리에서 회개하고 돌아서서 하루에 삼천 명씩 회개시키는 성령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하나님의 온전한 성도가 되는 우리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7. 본문: 33-34절: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주님을 위해서라면 감옥에도 가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베드로!!! 참으로 대단한 결심이요 결단이지 않는가? 우리가운데 주님을 위해서라면 감옥도 가겠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이 한 목숨도 드리겠다. 하는 사람 있는가?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이요 각오요 선포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놀라운 의지의 결단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만다.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여러분도 수없이 결단했을 것이다. ‘나는 꼭 이렇게 할거야. 내 생명 주님께 다 드리리. 그렇게 해야 함이 마땅해!!!’ 그러나 우리 역시도 수 없이 주님을 모른다고 했다. 외면했다. 결정적 일 때 마다 돌아섰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 우리를 주님을 모른다 하며 무엇이 우리를 외면하며 돌아서게 했을까? 나름 이유와 명분을 내세웠지만 결국은 육체의 이익과 자랑, 내 자신의 보존과 보호를 위함 때문이 아니었는가?
우리는 언제까지 주님을 배반할 것인가? 결코 영원할 수 없는 이 육체를 위함 때문에……/ 사도베드로는 닭소리만 울리면 마음이 두근두근 했을 것이다. 닭 울음소리는 새벽마다 울렸을 테니 베드로는 새벽마다 늘 깨어있지 않았을까? 우리의 심장을 깨우는 소리는 무엇이어야 할까?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던 망치소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8.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우리가 이 말씀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진리가 있다. 그것은 히브리어에서 ‘안다. 알다’ 라는 단어는 지식이나 앎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을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주님을 안다 하지 않고 모른다 한 것은 주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가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았음을 밝혀주는 것이다. 진실로 그렇다. 참 신앙은 지식이나 앎이 아니다. 참 신앙의 힘과 능력은 주님과의 친밀하고 깊은 인격적인 만남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한국교회에서 주님과 친밀한 의인을 찾으신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 주님의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신앙은 외적인 것인가? 내적인 것인가? 왜 신앙의 성숙과 변화가 따르지 않는가? 참 신앙은 주님에 대한 머리 지식이 아니라 주님과의 마음의 관계이다. 최후까지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온전한 신앙은 성경에 대한 앎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을 열매 맺는 삶의 변화에 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 하였고” (렘1:5)
주님은 나를 아시는데 나는 주님을 과연 알고 있는가? 주님은 나를 품으셨는데 나는 여전히 주님밖에 있는 것은 아닌지. 주님을 배반하는 자가 아닌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인정하는 신앙!!! 그가 주님 안에 거하는 주님의 성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