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으로 나아온 예배자: 술 마시고 짐승처럼 변하는 남편: 그녀의 간절한 소원: Szilverster 라는 남편의 삶과 가정에는 어떻게 언제쯤 하늘평화 하늘소망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까?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매일 새롭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1. 본문 1-2절의 말씀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여러분! 우리가 진실로 두려워해야 할 것, 걱정해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오면 어떻게 되는 거야? 내가 암에 걸리면 내 식구들은 어떻게 될까? 내일의 삶이 오늘보다 어려우면 어떻게 하지? 내 자녀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내 목소리가 망가져 버리면? 내 손가락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하지?’ 이에 대한 것이어야 할까요? 세상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같은 두려움과 걱정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에서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하는 우리가 진실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믿음 없음’과 ‘안식에 들어가지 못함’ 입니다. 실로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이 모든 육체는 죽음과 함께 흙이 되어 버리겠지만 영혼은 구원하심을 받지 못하면 어디에서 안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복음을 들은 자는 다 하나님의 약속의 나라에 이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 은혜교회에 속해있는 모든 성도들을 주님의 나라에서도 다시 만나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나의 나라!!! 그 나라에서도 모두 만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2. 본문 2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because those who heard did not combine it with faith.”
무슨 의미일까요? 복음 즉,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하여 듣기는 들었지만 그 구원하심에 합당한 믿는 자! 확신하며 행동하는 자의 삶을 살지 못함으로 복음이 열매 맺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했다” ……..
여러분! 여기서 좀 쉽게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나는 자동차 운전을 할거야 해 놓고 운전면허증을 따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장학금을 받고 말꺼야!!! 해 놓고 열심으로 학업에 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건강하게 살고 싶어! 해 놓고 매일 삼겹살 오겹살만 배가 터지도록 먹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들에게서의 문제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말과 행함이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믿어!!’ 해 놓고서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삶의 기준대로 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은 결코 성취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애굽의 노예 생활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복음을 주셨습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복음은 출애굽하는 것이었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애굽으로부터의 구원, 가나안 땅에서의 안식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거인이라 불리던 아낙자손들이 진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을 무엇으로 이겨내고 그 약속의 땅을 차지할 수 있을까?
이제 열두 명의 정탐꾼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해서 가나안 땅의 사람들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 그리고 그곳의 토지는 비옥한지 메마른지를 정탐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과연 어떠한 마음과 눈으로 정탐했어야 할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마음과 눈이어야 할까? 아니면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는 육체의 마음과 눈이어야 할까? 안타깝게도 열두 명의 정탐꾼 중 열 명은 눈에 보이는 대로 정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약속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고 육체의 마음과 눈으로 본 자들의 실체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나는 연약하다, 보잘것없다. 메뚜기 같다. 실패할 것 같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한 자들의 비명입니다.
4. 하나님을 진실로 신뢰했다면 아무리 커도 작아 보일 수밖에 없고, 아무리 높아도 낮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강해도 이길 수 있다는 믿음으로 도전합니다. 세상을 이김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신다.”(민4:9)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한 사람들의 선포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여! 당신들의 이와 같은 선포의 능력은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성도 여러분! 비명과 선포 사이에서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세상이 큽니까? 복음 안에서 사는 우리가 큽니까? 세상이 강합니까?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강합니까? 아무리 작아도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큰 자입니다. 아무리 약해도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강한 자입니다. 나는 예수로 강하다!!!
5. 본문 2절 하 반절의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무슨 의미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의 복을 누리려면 아낙자손과 싸워야 함은 필연적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사명에 대하여 믿음으로 묶이지 못했고 결국 가나안 땅에도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믿음이 없음이 문제였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언약된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이 세상의 모든 세력과 싸워야 하는 것 역시도 우리 성도들의 필연적 사명입니다. 무엇으로 맞서야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겠다는 약속은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장애물을 만날지라도, 그 어떤 고난이 몰려올지라도, 그 어떤 원수마귀들이 대적할지라도 친히 책임지시고 보장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복음을 들은 자다움으로 거침없이 세상과 맞붙어야 합니다.세상과 맞붙어 싸우러 나가는 행함!!! 그것이 믿음이고 그 믿음으로 세상의 벽들을 넘어설 때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됩니다.
6. 마태복음 7장 21-23절의 말씀보시겠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이름으로 예언하고 예수이름으로 병 고치는 것만이 아니라 믿는 자 다움의 삶! 하늘나라를 누릴 자다움의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과연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자 다움의 믿는 자의 반열에 속해있습니까? 참 믿음은 생각에 머물지 않고 행함으로 온전해집니다.
7. 한국교회가 왜?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믿는 다는 것을 하나님을 닮아가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내는 삶의 변화로 열매 맺지 않고 그저 교회 다니고 예배 참석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이 왜 지탄을 받습니까? 목사의 인격과 삶이 복음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대해서는 아는데, 설교는 하는데, 심방은 다니는데 여전히 세상을 넘지 못한 세상적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이 복음적인 삶을 살지 못하니까 성도들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입니다. (거짓말하고 사기치고 사치하고 교만하고 안 믿는 사람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교회 다니는 사람 끌어 오려 하고 인색하고) 교회 안에서와 교회 밖에서의 행동 양식이 다르니까 세상이 ‘너희는 가짜야 연극하지 마라!’ 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을 이기지 못한 증거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가 그 삶에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을 드립니다. 복음과 믿음 사이에서 나는!!! 오늘 우리는 복음을 들은 자에 머물러 있습니까? 아니면 들은 바 그 복음에 합당한 행동하는 믿음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