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107편 20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 도다.”
아내가 그동안 정들었던 집, 안락한 생활을 가져다준 교육사업체,
그리고 부모형제를 뒤로하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나라,
헝가리까지 왔다. 표면적인 이유는 남편인 나와의 동행이었지만
그 뒤편에는 보이지 않는 아내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나와 같은 복음전도자로서 살아야 하는 삶의 뜻과 숙제가
아내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거리에서 찬양할 일꾼은 있는데 그와 동행하여
반주(伴奏:accompaniment)할 일꾼이 없다면 그것은 온전히 행할 수 없는 반쪽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짝이 되어 하늘의 뜻을 이루어 가라고
나에게 아내를 허락하여 주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 그 어디 쉬운가?
사방에서 우리의 삶에 내리신 하나님의 뜻을 꺾기위하여 사단이
우는 사자처럼 넘실댄다. 건강이 위협하고, 물질이 협박하며, 사람들이 대적하여
거룩한 삶의 숙제를 완성해가고자 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러나 아무리 사단이 포학(暴虐:tyranny)하게 덤벼들어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자기 사람들에게 내리신 뜻을 성취시켜 가신다.
마치 바로와 애굽의 군대가 전차 육백 승을 앞세우고 위풍당당하게 이스라엘을
추격하다가 흔적도 없이 홍해바다에 수장된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추격하는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하여 사명자의 길을 여전히 걷게 하여 주신다.
헝가리에 와서 사역한지 5개월쯤 지났을 때였다.
외국 생활이 어디 쉬운가?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하는 것부터
삶의 정착을 위해서는 해결해야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마구 받게 마련이다.
게다가 거침없이 사역하려는 남편을 따라 다니느라 몸에 무리가 온 것은 당연했다.
2001년 2월, 아내가 아침이 되었는데도 일어나지를 못했다.
‘일어날 힘이 없어!’ 하며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손을 잡으니 맥이 다 풀려 있었다.
나는 병원에 가자고 하였지만 아내는
‘외국인 의사에게 어떻게 옷을 들추고 청진기를 댈 수 있어.
몇 칠 쉬고 나면 좋아 지겠지.’ 하며 병원에 가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아내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축 늘어졌다.
말을 걸어도 제대로 소리 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숟가락을 들거나
입을 벌릴 수도 없을 만큼 맥이 빠졌다.
그래도 아내는 병원에 가기를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스스로 생각하길 자기가 건강하여 곧 힘을 얻게 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삼일이 지났다. 아침에 겨우 눈을 뜬 아내가 식은땀이 많이 흘러서
몸에서 냄새가 난다며 몸을 씻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머리도 감기고
몸도 씻겨 주었다. 아내는 기분이 좀 상쾌해 진다고 했지만 곧 다시 누웠다.
그런데 아내는 신기하게도 나약해져 축 늘어져 있던 삼일 간 새벽마다
거실에 걸어 놓은 십자가 밑을 향하여 엉금엉금 기어 나가 기도를 하였다.
‘어떻게 그 몸으로 기도 할 수 있었어?’ 라는 물음에
너무도 힘이 없어서 자신이 죽을 것 같다는 위협을 느껴
기도해야만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고는 했지만
무슨 힘으로 무슨 능으로 십자가 밑으로 나갈 수 있었겠는가?
신비하게 이끄시는 힘이 아내의 영을 움직이심으로 기도하게 된 것이다.
.
“하나님! 제가 왜 이렇게 갑자기 기어 다닐 정도로 힘이 빠져 버렸지요?
제가 이렇게 죽는 것입니까? 저를 어떻게 하시려고요.
저에게 힘 좀 주세요. 저를 일으켜 주세요.”
그런데 신비한 일이 터졌다. 나흘째 되던 날 새벽 미명에 아내는 눈을 떴다.
힘이 너무 없어 마치 꿈처럼 느껴지기는 했지만 제 살을 만져보고 분명한
의식의 상태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방에는 어두움과 적막함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낯선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언어였다.
“분명 꿈은 아닌데..........”
그리고 이제는 음성과 함께 까만 벽면에 글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글은 마치 컴퓨터의 모니터에 떠 있는 글자처럼 한 줄 한줄 나타나기 시작 했다.
그리고 써진 글에 따라 읽는 음성이 들려 왔다. 그때 아내는 그 글과 음성을 들으며
속으로 생각하기를 “누군가 하늘의 언어와 하늘의 음성으로 나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는 구나.” 하며 혹시 남편인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나 싶어
나를 더듬어 만져 봤지만 남편인 나는 무심히도 곤히 자고 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글과 음성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생각하며 계속해서
보여 지고 들려지는 글과 음성에 집중하였다.
신비한 느낌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에 전기에 감전된 듯 감겨왔다.
그러면서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러나 그 날의 새벽잠은 지난 삼일간의
맥이 풀려서 죽어가는 신음을 하며 자는 잠과는 달랐다.
마치 단잠을 자는 것 같았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밝은 아침이 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제의 아니 조금 전 새벽미명까지 지니고 있던
맥이 다 풀려버린 병든 몸이 아니었다. 몸이 훨씬 가벼워졌고
그때부터 죽을 먹으며 기운을 차리기 시작하였다.
마치 무덤에 장사 된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처럼
아내도 나흘째 되는 새벽 미명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힘을 얻은 것이다.
아내는 그 새벽에 남편인 나와 같은 공간, 같은 침대에 누워있었지만
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듣고 보며 성령의 거룩한 임재를 체험한 것이다.
창세 이후로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말씀으로, 음성으로 다가오셨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야곱, 라반, 모세, 다윗..........베드로, 바울...등
셀 수도 없다. 그리고 각 사람에게 필요한 말씀과 음성으로
은혜를 베풀어주심으로 삶에 힘과 능력을 받아 고침 받고,
일어서고, 도전하고, 순종하여 모두 승리자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이시간은 삶에 시달려 영육으로 고통하며 신음하는 사람들에게로 달려오신다.
그리고 각자에게 필요한 은혜를 아낌없이 부어주신다.
마치 나의 아내에게 하늘의 언어와 하늘의 음성을 가지고
다가오셔서 놀랍고 신비하게 치유하신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모두에게 다시금 새롭고 강건하고 충만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 가는 성도의 삶, 교회의 삶을 살게 하신다.
상처받고 병들어 신음하는가?
그렇다면 말씀이 들려오는 자리를 향하여 나아가야한다.
기필코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래야 회복되고 치유 받으며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시편29편 11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살아가야 할 성도를 향하여
이렇게 선포하여 주신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 한 뭉치 무화과 중에서 -